이재형 (사)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 소장

 

3.1 운동 이후 우리 민족은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웠고, 독립군은 만주와 간도지역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1920년 봉오동 전투에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일본군을 격파하자 일본은 간도지방의 독립군을 공격할 명분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일본은 중국의 마적단을 매수해 일본의 영사관을 공격하도록 했다. 이는 일본이 자주 사용하는 비열한 방식으로, 마적단 토벌을 구실 삼아 독립군을 공격하려는 속셈이었다. 일본이 2만 5천명의 병력을 동원해 대규모 토벌작전에 나서자, 독립군은 간도 일반인들의 대규모 피해를 우려해 일단 백두산 밀림지역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독립군을 뒤쫓았다. 마침내 1920년 10월 21일, 이동 중인 독립군과 뒤쫓던 일본군이 청산리에서 맞붙은 것이다.

청산리대첩은 김좌진(백야)·이범석(철기) 등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이 청산리 일대에서 10월 21∼26일 사이에 10여 회의 전투 끝에 간도에 출병한 일본군을 대파한 전투로 독립군이 행한 전투 중 가장 혁혁한 전과를 올린 대첩이었다. 독립군은 이 대첩에서 일본군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명을 사살했으나, 독립군 측 전사자는 100여명에 불과했다. 이 전투에 참가한 주력부대인 북로군정서군의 병력은 약 1600명이었고, 그들이 장비한 무기는 소총 1300정, 권총 150정, 기관총 7문 등이었다. 

독립군은 이들 무기를 시베리아에 주둔해 있던 체코군단으로부터 구입했다. 체코군단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지배하에 있던 체코의 러시아 망명객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 징집돼 참전했다가 러시아군에 포로가 됐거나, 탈영한 체코인들이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비롯한 추축군(樞軸軍)에 맞서 싸우려고 러시아 승인 하에 만든 부대였다. 이들의 목적은 체코의 독립이었다. 체코군단은 독립을 얻을 때까지 싸울 각오였지만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집권한 볼셰비키 정권은 독일과 브레스트-리토브스크 협약을 맺고 연합국에서 이탈하자, 더 이상 러시아 땅에서 싸울 명분을 잃게 됐다. 이들은 러시아를 통한 독립전쟁의 길이 막히자 1919년 시베리아횡단철도로 1만㎞를 달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철기 이범석은 1920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체코군단 사령관 가이다 장군을 만나 무기구매를 요청했다. 가이다 장군은 “우리도 한국과 비슷한 입장인데, 당신들을 도와주지 않으면 누구를 도와주겠소?” 하면서 흔쾌히 승낙했다. 그렇게 해서 구매한 무기는 소총 1200여 정, 기관총 2정, 박격포 2문, 탄약 80여만발 및 다량의 수류탄 등이었다. 특히 연해주에 거주하는 최재형 선생과 한인 이주민들은 쌈지돈, 은비녀, 금가락지 등을 헌납해 무기 구입자금을 모았고, 그 곳 청장년 약 6000명은 이 무기를 릴레이식으로 은밀하게 북간도까지 약 5백리 길을 옮김으로써 인류 역사상 보기 드문 무기운반 작전이 완수됐다. 아무 보수도 없이 오직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한 망국 백성들의 눈물겨운 애국심이 청산리대첩의 큰 동력이 된 것이다. 

한편 체코군단은 1919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그 곳을 점령하고, 연합군이 제공한 선박을 타고 1920년 중반까지 6만여명이 지구 한 바퀴 거리를 항해해 유럽에 도착했다. 그사이 전쟁은 끝나고 새로 탄생한 조국의 수도 프라하에서 그들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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