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영국 찰스 왕세자의 장남인 윌리엄 왕자가 최근 남들과 똑같이 공군의 고된 수색 구조 헬리콥터 훈련을 마치고 헬기 조종사로서 임무를 시작했다. 그는 해저 석유 자원을 놓고 아르헨티나와 긴장 속에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남대서양의 외로운 섬 포클랜드에 배치될 수도 있다고 보도됐다.

윌리엄 왕자는 아버지인 찰스 왕세자에 이어 영국 왕위 계승 서열 두 번째다. 이 귀하신 몸이 위험한 군 복무를 자원했을 뿐 아니라 언제 목숨 걸고 싸워야 할 일이 생길지 모를 잠재적 전장(戰場)에 배치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가했다 본국에 돌아온 윌리엄 왕자의 동생 해리 왕자는 다시 육군 항공대에서 헬기 조종사 훈련을 받고 있다. 이 두 왕자의 아버지인 찰스 왕세자도 해군 헬기 조종사였다. 뿐만 아니라 왕세자의 동생인 앤드루 왕자는 1982년 포클랜드 전쟁 때 직접 전투 헬기 조종사로 참전하기도 했었다.

이렇게 왕실의 가족을 포함한 사회적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 국가 유사 시에 목숨을 거는 일까지도 주저하지 않고 사회 성원(成員)으로서 앞장서 의무를 다하는 것을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 Oblige)라 한다.

‘귀족의 의무’라고 직역되는 프랑스 말이지만 그 함축(含蓄)의 의미는 그보다 훨씬 더 큰 세계어다. ‘신분이 고귀한 사람들은 바로 그 보통 사람과 다른 특별하고 고귀한 신분 때문에 마땅히 솔선하고 헌신해야 할 도덕적 사회적 의무가 있다’는 것과 ‘그런 솔선수범에는 일반의 존경이 따르며 동시에 그것이 고귀한 사람들의 자부심이자 숭고한 명예’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은 19세기 초(1808년) 프랑스의 정치가이며 작가인 가스통 피에르 마르크라는 사람에 의해서다. 그렇다고 ‘말’이 만들어진 것이 그 시점이라는 것이지 귀족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이 그 때부터 비롯됐다는 것은 아니다.

실천의 역사는 아스라한 과거로 더 거슬러 올라간다. 가스통 피에르 마르크는 단지 로마 시대 이래로 유럽의 귀족들이 마치 계층적인 합의라도 있었듯이 실제 생활에서 자발적이고 경쟁적으로 실천해오던 뿌리 깊은 전통을 뒤늦게 관념(Concept)화 하고 언어로 디자인(Design)해낸 것에 불과하다.

유럽의 귀족들은 특히 목숨을 거는 전쟁터에 나가는 일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더욱 헌신적으로 실천했다. 그것을 영광으로, 명예로 알았다.

로마 시대에 로마와 한니발 장군의 카르타고와의 싸움인 제2차 포에니 전쟁(B.C 218-B.C 202) 16년 동안에만 최고 관직의 지도층인 집정관 13명이 전사했다. 로마 1천 년 역사에서 전반부 5백 년 동안 크고 작은 전쟁에서 귀족들의 전사가 늘어 원로원에서 차지하는 귀족들의 비중이 나중에는 15분의 1로 줄어들 정도였다.

로마 귀족들은 전쟁에 나가는 일 말고도 공공 봉사, 기부, 헌금도 아낌없이 했다. 로마가 제정(帝政)으로 돌아선 후반기에 1인 전제정치와 귀족층의 도덕성 해이로 제국의 1천 년 영화가 끝이 났지만 이 같은 귀족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전성기의 로마를 강성하게 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14세기 1백년 전쟁에서 도버 해협의 프랑스 칼레(Calais)시가 함락됐을 때(1347년)였다. 승전국 영국 왕 에드워드 3세가 강화 조건으로 칼레의 대표 시민 6명의 목숨을 요구했을 때 부와 권력과 명예를 가진 귀족과 지도층들이 전체 시민을 살리기 위해 에드워드 왕 앞에서 교수형에 처해지기를 자원했었다고 전해진다.

이에 감동한 영국 왕은 마침 임신 중이던 왕비의 간청도 있었지만 왕 앞에 끌려온 이들 모두를 살려주었다. 그렇지만 지원자 중 최고의 부자였던 한 사람은 자원자들의 번의를 막고 ‘죽음의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자결한 뒤였다.

이 살신성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기념하기 위해 그 사건으로부터 550년이 지난 1895년 조각가 로뎅에 의해 ‘칼레의 시민’이라는 비장한 표정의 6인 조각상이 세워졌다. 세계 1, 2차 대전 때는 영국 고위층 자제들이 다니는 명문 귀족학교 이튼 칼리지 출신 2천여 명이 전사했다.

6.25 한국전쟁 때는 142명의 미군 장성의 아들들이 참전했으며 그 중 35명이 죽거나 다쳤다. 8군 사령관이던 밴플리트 장군의 아들은 폭격기 조종사로 출격했다가 전사했다. 아이젠아워 대통령 아들도 참전 육군 소령이었다. 모택동의 장남 모안영(毛岸英)도 전쟁에서 죽었다.

모택동은 ‘다른 사람의 자식들만 전쟁에 나가게 했다면 내가 어떻게 지도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그 때의 소회를 말했었다고 전해진다. 외침(外侵)이 있을 때 왕실의 처첩과 혈족들을 이끌고 멀리 피난하기 바쁘던 우리 조선조의 모습과 얼마나 다른가.

공정사회가 이 시대 주요 화두가 되면서 새삼스럽게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강조되고 있다. 지도층이 솔선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국민통합, 사회통합의 원동력이다. 강성한 국가는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있을 때 가능했다.

권력 있는 사람은 도덕성과 사회적 의무의 평등한 수행에 솔선하고, 돈 있는 사람은 기부와 헌금으로,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은 그 재능으로 국가 공동체 번영에 헌신해왔다. 이것은 남을 위한 것 같지만 결국은 나라도 살리고 자신도 살리는 길이었다.

우리에게도 비록 가뭄에 콩 나듯 했을지라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이 없었던 것이 아니며 그것을 실천한 역사적 위인들도 많았다. 그들의 삶을 재조명하고 이 시대에 그것을 실용적 실천적 정신으로 무성하게 되살린다면 우리가 일류국가로 향하는 한 고비를 넘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라는 것은 더 말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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