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호익 동북아공동체ICT포럼회장/한국디지털융합진흥원장

의사가 병원 밖에 환자가 있는 곳으로 직접 가서 진료하는 왕진(往診) 서비스가 4차 산업혁명 기술과 맞물려 전 세계적으로 활성화되고 있다. 스마트폰을 활용한 의료기기의 소형화·경량화로 모든 의료장비가 간편화되고 스마트폰을 몇 번만 터치하면 의사를 집으로 부를 수 있다. 초음파를 비롯해 웬만한 진단기기가 스마트폰에 장착되면서 의사들이 들고 다닐 수 있고 스마트폰 영상은 의사와 환자가 직접 대면하는 것처럼 화질이 좋아 원격진료가 가능하고 진료 기록 역시 스마트폰 전송이 가능해졌다.

미국에서는 방문 진료만 전문적으로 하는 벤처기업이 성업 중이다. 이들은 '우버 의사'라고도 불리는데 의사를 만나려면 3주 이상을 기다려야 했던 비효율이 사라지고 있다. 대표적인 왕진 벤처기업은 힐(Heal), 페이저(Pager), 메드제드(Medzed) 등으로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에서 신청하면 원하는 시간에 사무실, 호텔, 가정집에 찾아가 왕진 서비스를 한다. 미국 홈케어 의료아카데미는 미국의 한 해 왕진 건수가 520만건으로 계속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은 70세 이상 1인당 입원비 지출액이 평균 1만 2000달러 수준인데 왕진을 통해 1인당 4200달러의 의료비를 절감할 수 있다.

우리보다 먼저 초고령화 사회를 겪고 있는 일본은 2000년대 중반부터 방문 진료를 활성화하고 있다. 일본은 베이비붐 첫 세대와 마지막 세대인 1950년생과 1960년생이 각각 75세, 65세가 되는 2025년이 되면 재택의료 서비스를 받는 사람이 100만명을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 2007년엔 방문 진료 건수가 22만여건이었으나 현재 의사가 환자 집으로 정기적으로 가는 방문 진료는 월평균 70만건이다. 환자들이 부정기적으로 의사를 부르는 왕진도 매달 14만건에 이른다. 한 해 1000만건의 진료가 병원 아닌 환자 집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한국도 지난해 65세 이상 인구가 711만명(14.2%)으로 고령사회로 진입하고 초고령자, 만성질환자 등 왕진이 필요한 의료취약계층이 15만명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어 왕진 도입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현행법에 왕진 서비스를 제공한 의사에게 ‘자격정지 3개월’의 처벌을 하는 등 불법으로 규정해 시대 흐름에 역행하고 있다. 응급환자 발생 등 예외가 허용되지만 왕진비를 병원진료비와 동일하게 받도록 해 턱없이 낮은 의료수가 때문에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규제 때문에 환자들은 편리한 의료 서비스도 못 받고 방문의료를 통한 일자리 창출도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르면 내년 상반기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왕진(往診) 서비스가 활성화가 가능할 전망이다. 국회 보건복지위는 최근 왕진서비스에 대해 진료비를 더 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건강보험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개정안은 환자나 보호자 요청으로 의사가 방문 진료(왕진)를 한 경우 요양급여 비용을 가산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여야 간 큰 이견이 없어 이번 정기국회에서 통과할 전망이라고 한다. 복지부 관계자는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대로 왕진 모형을 개발하고 이에 따른 수가(酬價) 설계를 할 것”이라며 “늦어도 내년 6월쯤에는 시행이 가능할 전망”이라고 한다. 또한 지난 4월에는 복수의 의료기관이 제휴해 365일 24시간 왕진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스템도 구축한 바 있다.

의료기기가 정보기술과 접목되고 인구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왕진 서비스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는 충분히 형성돼 있다. 디지털 헬스케어를 주창했던 에릭 토폴 미국 스크립스중개과학연구소 소장은 “환자와 의사 간 정보 불균형을 전제로 하는 현대의학의 주도권이 정보기술(IT) 등 과학기술 발달에 따라 의사에서 환자로 옮겨갈 것”이라며 이를 ‘의료 민주화’라고 규정했다. 전문가들은 재택의료가 활성화하면 환자의 의료 접근성 향상은 물론 건보료 절감에도 도움을 줄 것으로 보고 있다. 환자가 집에서 진료받을 경우 비용이 병원 입원의 3분의 1에 불과해 건강보험 재정을 절감할 수 있는 것도 긍정적 측면이다. 앞으로 방문의료는 물론 원격의료의 도입으로 의료계의 시대착오적인 비효율성을 걷어내는 게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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