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수형자기록표. (출처: 국가보훈처)
유관순 수형자기록표. (출처: 국가보훈처)

 

“내 손․다리 부러져도 이길 수 있으나

나라 잃어버린 고통 견딜 수 없다”

9월 28일 유관순 열사 순국 98주기

[천지일보=이혜림 기자]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고통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 유관순 열사의 유언 中-

1919년 3월 1일 일제강점기 천안 아우내 장터에 단연 눈에 띄는 여성이 있었다. 바로 장터에 모인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며 앞장서서 대한의 독립을 외친 유관순 열사다. 하고 싶은 것 많고, 미래를 꿈꿀 나이 19살. 9월 28일은 19살의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가 순국한 지 꼭 98년 되는 날이다. 유관순 열사 순국 98주년을 맞아 어린 나이임에도 나라를 위해 독립을 외쳤던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가 독립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당시로 돌아가 봤다.

유관순 이화학당시절. (출처: 국가보훈처)
유관순 이화학당시절. (출처: 국가보훈처)

 

유관순 열사의 부친 유중권 선생은 기독교 감리교에 입교한 개화 인사였다. 그는 국권 회복을 위해 향리에 흥호학교를 세워 민족교육 운동을 전개했는데 이러한 부친의 영향으로 유관순 열사도 민족의식을 쌓아갔다.

이를 지켜보던 샤프 선교사의 권유로 유관순 열사는 17살이 되던 해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교비 유학생(학비를 면제받고 졸업 후 교사로 일하는 학생)으로 편입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했다. 일제의 독살설로 백성들은 분노했고 이에 한국인 일본 유학생들은 2월 8일에 독립 선언을 하고,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유관순 열사도 이화학당 내의 비밀결사인 이문회 선배들을 통해 3.1 운동 추진 계획을 접했다. 발발하기 전날 그는 서명학, 김분옥 등 6명의 고등과 1학년 학생들과 시위 결사대를 조직해 시위에 참여하기로 맹세했다.

당일 탑골공원을 나온 만세 시위대가 학교 앞을 지나자 유 열사는 결사대와 함께 “내가 있는 동안 너희들을 내보내 고생시킬 수 없다. 나를 밟고 넘어갈 테면 가라”고 하는 프라이 이화학당 교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뒷담을 넘어 시위운동에 참여했다.

유관순 열사 동상. ⓒ천지일보 2018.3.21
유관순 열사 동상. ⓒ천지일보 2018.3.21

 

이로써 민족혁명운동인 3.1운동의 한복판으로 뛰어들게 된 유관순 열사는 3월 5일 선생은 6명의 시위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서울에서 전개된 최대의 시위운동인 남대문역(서울역) 만세 시위운동에도 참여했다. 학생들이 3.1운동에 대거 참여하고, 학교가 만세 시위운동의 계획 추진 기지가 되자 조선총독부는 3월 10일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대한 임시휴교령을 내렸다.

학교가 문을 닫자 유 열사는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을 고향에 전하고,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려고 사촌 언니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 귀향했다. 그는 동네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서울의 3.1운동 소식을 전하고 설득한 뒤 4월 1일(음력 3월 1일) 천안 아우내 장날 정오에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했다. 그는 유림의 대표와 집성촌 대표를 움직여 참가 인원을 확보하고, 사람들에게 나눠줄 태극기를 직접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

유관순 판결문. (출처: 국가보훈처)
유관순 판결문. (출처: 국가보훈처)

 

거사날인 4월 1일 정오 유관순 열사는 군중 앞에서 “여러분 우리에겐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가 있었다. 그러나 일본놈들은 우리나라를 강제로 합방하고 온 천지를 활보하며 우리 사람들에게 가진 학대와 모욕을 다하고 있다”며 “우리는 10년 동안 나라 없는 백성으로 온갖 압제와 설움을 참고 살아왔지만 이제 더는 참을 수 없다. 우리는 나라를 찾아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이어 “지금 세계의 여러 약소민족은 자기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어서고 있다”며 “나라 없는 백성을 어찌 백성이라 하겠나. 우리도 독립 만세를 불러 나라를 찾자”고 연설했다.

유관순 열사의 연설로 군중들의 애국심을 한층 고조됐고 독립의 열기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시위 대열이 아우내 장터 곳곳을 누비자 병천 헌병주재소의 헌병들이 달려와 총검을 휘두르며 만세 시위운동을 탄압했다. 나중에는 천안 일본군 헌병분대원과 수비대원들이 총검으로 시위 운동자들을 학살해 이날 19명의 사망자와 3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때 부친인 유중권이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려 순국했고, 이를 보고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고 달려들던 유관순 열사의 모친도 일본 헌병들에게 학살당했다.

유관순 열사 영정 (사진제공: 천안시) ⓒ천지일보
유관순 열사 영정 (사진제공: 천안시) ⓒ천지일보

 

그날 저녁 유관순 열사와 시위 주동자들은 체포돼 천안헌병대로 압송됐다. 유 열사는 갖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시위 주동자라고 말하면서 죄 없는 다른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호통쳤다. 또 그는 공주감옥으로 이송되며 군중들이 많이 모인 곳을 지날 때마다 독립 만세를 외쳤다. 유 열사는 법정에서 “나는 한국 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라며 “우리들은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들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고 일제의 재판을 거부했다.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받게 된 선생은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했다.

서대문감옥으로 옮겨져 온갖 탄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지속해서 옥중 만세를 불렀던 그는 지하 감방에 감금돼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고문을 당해 장독(杖毒)으로 1920년 9월 28일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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