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사)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우리나라는 지구상에 유일무이한 분단국가다. 하여 모두들 통일을 지상의 과제라고 말하고 있다. 허나 각계각층 국민에서부터 정당, 사회단체, 기관별로 구체화해 보면 실제로 통일보다는 현상 유지에 급급하고 있는 암울한 상황이다. 아마도 가장 ‘반통일세력’을 꼽으라면 정치인 집단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라의 큰 일군’이라 칭하는 국회의원들은 어떤가? 그들에게 최우선주의는 지역 주민들로부터 표를 다시 받아 다음 선거에서 또 당선되는 것이다. 국회의원부터 정부 기관의 장에 이르기까지 좀 심하게 표현하면 남북통일이 될 경우 2명에서 한 명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 운명인 것이다. 그럴진대 왜 그들이 통일에 발 벗고 나선단 말인가. 

지난 20여년간 극에서 극으로 변하는 남북관계를 떠올리면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그래도 두 가지 교훈은 확실히 얻었다. 첫째, 주변 강대국이 아무리 간섭한들 우리 자신의 의지와 실천으로 통일로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시작이 좌초되지 않으려면 집권 정치 세력의 이념에 따라 달라지지 않고 환경적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 우리만의 통일에 대한 확고한 계획이 필요하다는 것. 둘째, 우리만의 확고한 계획은 평화와 통일의 담론을 정치와 이념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줘야 작성할 수 있다는 것. 유력 정치인이 자신의 통일론을 설파하고, 혹여 집권하면 이를 실천에 옮기지만 그 누구도 권불십년의 법칙을 거스르지 못한다는 것.  한국 정치사에서 정당의 수만큼, 대선 후보의 수만큼 통일론이 등장했지만 정작 그 누구도 자신의 통일론으로 반대편 정치인을 설득하거나 국민 스스로 이에 대해 이해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준 적이 없다.

남북관계와 통일은 그 중요성과 민감성 때문인지 정치 지도자가 방향을 제시하면 지지자들은 이를 승인하는 전근대적 동원 모델을 벗어나지 못한다. 한국 정치사에서 상대방을 종북세력과 반통일세력으로 각각 규정하면서 선동과 죽고 사는 쟁투가 있었을 뿐, 미래 통일 한국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에 대한 차분한 대화가 이루어진 적이 없다. 

최근 대통령과 청와대가 초당적 협력을 간절히 원했지만 지금 가는 길에 어떤 암수가 있으며 어디가 종착역인지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야당의 신뢰를 바랄 수는 없다. 아무리 공을 들여 통일의 정원을 가꾸더라도 정권이 바뀌면 그 정원은 폐허로 변한다. 대화와 설득, 공론과 숙의에 바탕을 두지 않는 평화의 찬가는 어느 순간 공포의 흐느낌으로 변할 수 있다. 그래서 통일의 여정을 정하려면 함께해야 한다. 현 정부는 촛불정신을 계승하면서 에너지와 교육과 같은 중요 사안에 대해 공론조사라는 이름의 숙의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남북관계가 호전될수록 한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결정의 순간이 곧 다가올 것이며, 이에 따라 논란도 격화될 것이다. 이 혼돈의 상황을 타개하는 효과적인 방법은 장기적 관점에서 평화의 정착과 통일을 위한 공론화를 미리 시작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만 국제 정세의 변화와 국내 정치의 부침에도 흔들리지 않는 통일의 여정을 지속할 수 있다. 서독 헬무트 콜 총리가 1980년대 중반 당내 우파를 설득하면서 정적의 정책을 과감히 계승하는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일찌감치 전 국민적 숙의의 과정에서 국민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상시적인 공론화를 통해 통일로 가는 길이 한 번의 화려한 쇼가 아닌 예측 가능한 우리의 현실이 됐으면 한다. 

종전선언 하나만 놓고 말해 보자. 종전선언을 하면 유엔군이 나가야 하고 한미동맹이 깨진다는 것이 그 반대론자들의 명분이다. 좀 심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북한에 대한 공부가 안 돼 있다는 반증이다. 김정은과 북한 집권세력이 왜 종전선언을 바라는지 파악이 안 됐다 이 말이다. 북한의 집권세력은 절대 주한미군이 당장 나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들이 나가면 국력이 40여배 앞선 ‘남조선이 북침’을 할까봐 걱정하는 것이 평양의 관점이다. 북한은 그만큼 허약하고 또 허약하다. 묻고 싶다. 정전을 하자는데 계속 전쟁을 벌려 반드시 승공통일을 하자고 지난 6.25 한국전쟁 시 주장한 사람들에 의해 얼마나 많은 우리 국군이 희생되고 포로로 끌려갔는가. 정전 담판이 시작된 즉시 정전협정을 맺고 전쟁을 스톱했다면 오늘 수많은 국군포로가족들이 피눈물 흘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 논리다. 빨리 종전선언하면 남북한 사이 군사적 신뢰와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은 단숨에 올라갈 수 있다. 좀 더 폭 넓게 보고 대승적으로 생각하는 국민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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