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자.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성폭력 피해자.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심리적 지배한 뒤 성폭력 가해

아동·청소년이 가장 많이 당해

교회 내 성폭력도 그루밍 성폭력

[천지일보=임혜지 기자] “조카와 사랑하는 사이였어요.”

지난 5일, 법원은 조카를 성폭행한 외삼촌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법원이 조카와 사랑하는 관계였다는 외삼촌의 주장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대구지법 서부지원 제1형사부에 따르면 이모씨는 지난해 3월 대구 달성군에 있는 한 숙박업소에서 조카 박모양과 강제로 성관계를 맺은 혐의로 기소됐다.

당시 검찰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면서도 부모에게 위로를 받지 못해 애정 결핍 상태에 놓인 조카 박양을 이씨가 이용했다”며 “호의를 베푼 뒤 범죄를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이어 “박양 바지 버클을 움켜잡고 외삼촌을 힘껏 내치는 등 반항했다”고 덧붙였다.

반면 이씨는 “조카와 사랑하는 사이였다”며 성폭행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그러면서 그는 박양과의 대화 내역을 비롯해 기념일 선물을 주고받은 내역, 스마트폰 메신저 내용 등을 증거로 제출했다. 이에 법원은 박양의 진술만을 증거로 유죄 판결을 내리기는 어렵다고 판단해 무죄를 선고했다.

피해자와 돈독한 관계를 형성해 심리적으로 지배한 뒤 성폭력을 가하는 이른바 ‘그루밍(길들이다, Grooming) 성폭력’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그루밍 성폭력 양상은 주로 아동·청소년 대상 성폭력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실제 ‘탁틴내일 아동·청소년성폭력상담소’가 지난 2014년 7월부터 2017년 6월까지 3년간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의 상담사례를 분석한 결과 그루밍에 의한 성폭력 사례는 43.9%에 이르렀다. 피해 당시 연령은 중학생 또래인 14~16세(44.1%)가 가장 많았다. 11~13세도 14.7%, 6~10세도 14.7%나 됐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그루밍 성폭력의 가해자는 학교 선생님, 친척 등 대다수가 피해자와 가까운 사이로 나타난다. 특히 아동·청소년의 경우 인정과 애정을 받고 싶은 욕구가 크다. 가해자들은 이러한 점을 악용해 범행을 저지르기 전 피해자의 취미나 관심사를 파악해 선물을 주거나 공통의 관심사를 나누는 등 신뢰를 쌓는다. 때문에 피해자들은 가해자의 그루밍을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특히 최근에는 전남 광주광역시에서 고등학교 현직 교사인 최모씨가 제자인 1학년 여학생과 수차례 성관계를 맺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광주 교육 당국이 발칵 뒤집혔다. 조사 결과, 최씨는 제자인 김모양에게 평소 먹을 것을 사주거나 집에 바래다주고 김양이 아프다고 하면 약을 사주기도 했다. 심지어 김양에게 신용카드를 건네는 등 김양이 본인을 점점 더 신뢰할 수 있도록 했다.

이후 최씨는 가벼운 신체접촉을 시작으로 점차 수위를 높여 나가 결국 김양과 성관계까지 맺었다. 최씨는 이런 과정들을 “평범한 연인들 사이에 있는 일들”이라며 성폭행이 아니라고 했다.

그루밍 성폭행의 문제는 여기에 있다. 현행법상 미성년자의제강간 대상은 만 13세로 규정돼 있기 때문에 피해자가 13세 이상이고 서로 사랑하는 관계라고 주장하면 가해자를 처벌하기 어렵다. 즉 만 13세 미만인 아동인 경우에만 성관계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가해자가 무조건 처벌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국회에는 강압이 없었더라도 거부 의사를 밝혔다면 모두 성폭력으로 처벌하게 하는 개정안이 발의된 상태지만 아직 계류 중이다.

그루밍 성폭력는 비단 아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최근 논란이 되는 교회 내 성폭력도 그루밍 성폭력에 해당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교회 내 성폭력은 주로 심리적 지배 상태에서 벌어진 성폭력 행위이기 때문에 좀처럼 사회에 드러나기 어려운 특성을 갖는다. (관련기사 ☞ [인터뷰] “온누리교회 부목사에게 그루밍 성범죄 당하면서도 몰랐다”)

전문가들은 그루밍 성폭력 가해자가 피해자를 길들이고 통제하는 과정이 사회 권력 구조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했다.

이소희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그루밍 성폭력은 곧 권력형 성범죄라고도 볼 수 있다”며 “특히 청소년과 성인의 경우, 나이를 매개로 하는 수직적·위치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루밍 성폭력이 작동되기 더 쉽다”고 말했다. 이어 “그루밍 성폭력을 규제하는 법·제도의 기준이 명확해지는 것과 함께 개개인이 사회적 감수성을 갖추는 게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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