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유럽의 민주정치가 혼돈을 거듭하고 있다. 유권자의 선택, 그 결론이 무엇이든 그 또한 민주정치의 결과물이다. 옳거나 그름, 또는 선과 악으로만 따질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은 학자나 평론가들의 몫이지 유권자의 몫은 아니다. 유권자의 선택대로 정치체를 가동시켜야 한다는 것은 그 구성원들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가끔은 그 약속이 불편하고 괴물 같은 속성도 보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이유로 민주정치에 대한 불신과 한계는 정치학자들의 원초적 고민이라 할 만하다. 하기야 고대 그리스에서도 민주정치는 인기 품목이 아니었다. 플라톤도 혹평을 하지 않았던가.

공화주의의 오랜 전통을 가진 유럽, 거기에 더해서 민주주의의 가치까지 수용하며 근대 민주정치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유럽정치, 그중에서도 특히 중도개혁세력의 상징과도 같았던 복지국가 스웨덴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스웨덴의 중도좌파 연립정부를 이끄는 스테판 뢰벤 총리가 지난 25일 의회로부터 불신임을 당해 물러났다. 전체 의원 349명 가운데 346명이 참가한 가운데 불신임표가 204표나 나왔다. 60%의 의원들이 뢰벤 총리의 퇴진을 요구한 것이다. 물론 지난 총선 결과 당연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중심에 스웨덴 극우세력을 대표하는 ‘스웨덴 민주당’이 불신임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복지국가 스웨덴의 극우세력들

지난 9일 실시된 스웨덴 총선에서 뢰벤 총리가 이끄는 사회민주당을 비롯한 중도좌파 성향의 연립여당은 전체 349석 가운데 144석을 얻어 과반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물론 뢰벤 총리에 반대하는 중도우파 야권세력도 143석에 그쳤다. 문제는 그 틈새를 비집고 극우세력인 ‘스웨덴 민주당’이 62석을 얻어 정국의 방향타를 잡게 됐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집권세력은 극우세력을 완전히 배제하고 중도우파 성향의 야권과 연정을 모색했지만 이에 실패함으로써 결국 뢰벤 총리가 물러나는 사태에 이른 것이다.

과반을 채우지 못한 여권과 야권, 여기에 극우세력 ‘스웨덴 민주당’의 돌풍으로 스웨덴 정국은 더 혼란스럽게 됐다. 어느 쪽이든 독자적인 연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기존의 여권세력과 4개로 구성된 야권연맹이 리세팅 하거나 아니면 극우세력과 결국 손을 잡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도 저도 아니라면 총선을 다시 치르는 방법 밖에 없다. 특히 복지국가의 이상과 비전을 견인했던 스웨덴 정치에서 극우세력과 손을 잡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극우세력 스스로 ‘신나찌’를 표방하지 않았던가.

스웨덴 극우세력의 정치적 동력은 이번에도 끝없이 이어지는 ‘난민 행렬’이었다. 스웨덴은 유럽에서 인구대비 가장 많은 수의 난민을 받아들인 나라이다. 그러나 각종 범죄와 테러 심지어 난민자들 사이에도 더 이상의 난민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여론을 자극했고 그 선두에 스웨덴 민주당이 섰던 것이다. 마치 쓰나미처럼 유럽정치를 흔들고 있는 난민정책이 지난해 네덜란드와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지난 4월의 헝가리와 6월의 이탈리아까지 정치지형을 바꿔놓고 있는 셈이다. ‘반난민’을 표방하고 노동과 복지정책 등에서 극우를 표방하는 세력들이 대거 유럽정치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고 있는 현실은 유럽정치의 근간인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야기하고 있다. 그들에게 인권과 공존, 책임과 의무 그리고 시민과 덕성(德性)은 어떤 의미로 해석되고 있는 것일까.

그리스와 로마의 공화정은 오늘날의 그것과는 현격하게 다르지만 ‘공화주의적 전통’의 시원(始原)이 된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공화주의(Republicanism)’라는 말 자체가 성립될 수 없었던 중세시대를 지나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공화의 정치’는 다시 활력을 찾을 수 있었다. 중세시대 절대적 종교권력으로부터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그들의 공동체에 정치적 권위를 부여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르네상스 공화주의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니 그 때도 민주주의는 오히려 부정적이거나 경멸적인 개념이었다. 귀족이나 시민들이 ‘무지몽매한 사람들’과 정치적으로 평등한 권리를 가졌다는 생각은 꿈도 꿀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이후 ‘민주주의로의 길’보다 ‘절대군주정’으로 가는 길이 더 안전하고 현실적인 판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발전과 시민참여가 본격화되면서 절대군주정은 다시 공화주의적 전통을 복원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생존하기 위한 불가피한 정치적 선택이었을 것이다. ‘인민주권’의 정립은 그 사상적 토대가 됐다.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언급하며 공화파에게 가장 귀중한 책이라고 말한 것도 이런 이유였다. 군주정치의 속성과 그 한계를 우회적으로 역설했기 때문이다. 군주에게 복종하는 ‘신민(臣民)’이 아니라 모든 구성원이 합의한 원칙에 따라 공적인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정치적 결사체, 그것이 ‘공화정’의 기본 원리였다.

이렇게 형성된 근대 공화정의 원리는 당시 유럽 각국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다양한 형태로 발전된다. 군주정과 타협한 영국의 사례와는 달리 프랑스는 군주정을 붕괴시키고 공화정에 민주주의가 결합하는 방식으로 발전됐다. 그리고 더 극적으로는 루소와 몽테스키외 등의 이론적 논의가 미국으로 건너가 매디슨(J.Madison)을 비롯한 미국 헌법의 지도자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한국을 비롯해 미국과 유럽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표방하고 있는 ‘민주공화국’의 뿌리는 이렇게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그 뿌리가 형성된 유럽, 그중에서도 비교적 선진적인 스웨덴에서도 ‘반공화국의 깃발’을 든 극우세력들이 대거 출몰하고 있는 현실은 우리도 좀 더 냉철하고 관심 있게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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