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淸白吏)를 아는가. 청렴결백한 공직자를 의미하며, 오늘날 청백리상을 수여할 정도로 유명하다. 청백리 제도는 고려시대부터 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200여명의 청백리가 배출됐다. 도덕·효·인 등의 덕목을 겸비, 이상적인 관직자인 조선의 청백리를 알아보자.

백인걸 선생(제공: 문학박사 조성린씨) ⓒ천지일보 2018.9.27
백인걸 선생(제공: 문학박사 조성린씨) ⓒ천지일보 2018.9.27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백인걸 선생은 조선의 청백리 중 한 사람이다. 본관은 수원(水原)이고 왕자사부(王子師傅: 왕자의 스승) 익견(益堅)의 아들이다.

일찍이 김식이 성균관에서 강의하는 것을 보고 크게 깨우쳐 학업에 힘썼으며 조광조를 존경해 그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그 집 옆에 방을 만들어 기거하면서 배웠다. 하지만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로 스승과 동료들을 모두 잃자 금강산에 들어가 심신을 수양했다. 이후 다시 돌아와 생원시에 합격하고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547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이기 등이 권력을 전횡한다고 비난하는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돼 안변에 유배당하고 1551년에 고향에 돌아왔다.

선조는 대사헌․우참찬 등의 관직을 주면서 부르거나 식량을 내리기도 했다. 선조 2년(1569) 직접 편지를 보내 부르자 올라와 대사헌이 됐고, 여러 직책을 겸임하다가 1574년 사임했다.

을사사화 때부터 만 번 죽을 것을 무릅쓰고 곧은 말로 항거했는데 다른 사람은 감히 먼저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정직한 소리가 한때는 진동했고 간사한 무리들도 그를 무서워하고 두려워해 그들의 분함을 풀지 못했다.

80세가 넘어서도 학문을 닦고 연구하는데 힘썼다. 밤낮으로 연구를 하되 집에 거처할 때에는 가난하고 검소했으며 입고 먹는 것은 엉성하고 거칠었는데, 먼지가 자리에 가득 쌓여도 쓸지 않았다. 임금이 그의 기풍과 절개와 의리를 중히 여겨 끝끝내 총애하고 염려했다.

백인걸 선생은 돌도 지나기 전에 아버지를 여의었기에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

부계기문에 따르면, 을사사화가 일어나기 전에 윤원형 측 사람인 허자가 백인걸을 걱정해 하루는 백인걸을 초청해 저녁을 먹으면서 “내일 대간의 비밀지령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자네는 노모가 계시는데 어떻게 하겠는가?”하니 백인걸은 “이 몸은 벌써 임금님께 바쳤으니 어찌 개인의 사정을 돌아 볼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백인걸이 작별 인사를 하고 나오자 허자는 그의 손을 잡으며 “내일 자네는 군자가 되고 나는 소인이 되는 날이다”라고 말했다.

정리=장수경 기자
도움말=문학박사 조성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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