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리스트

 

BC 206년, 오랜 정치적 혼란을 극복하고 중국을 통일한 진(秦)이 멸망했다. 항우는 유방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함양을 먼저 차지한 유방을 한왕(漢王)으로 봉한 후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을 제후로 봉했다. 분노한 유방은 항우와 패권다툼을 결심했다. 항우보다 명성이 낮았던 유방은 미래에 대해 확실한 비전이 없었다. 불만은 다른 무장들에 비해 자신의 봉지가 작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다른 제후들도 만족하지는 않았다. 전영(田榮)은 팽월(彭越)과 연합해 과거 제의 땅 대부분을 차지하고 동방의 강자로 부상했다. 요동의 한광(韓廣), 조왕(趙王) 헐(歇)도 자립했다. 항우는 그들을 제압하느라고 서쪽을 돌아볼 틈이 없었다. 한신이 유방에게 관중을 돌파하고 항우를 공격하자고 건의했다. 유명한 암도진창(暗渡陳倉)이 시작됐다.

유방이 잔도를 수리한다는 소식을 들은 장감은 비웃었다. 잔도는 300여리에 걸친 험난한 지형에 설치돼 있었다. 유방은 스스로 그것을 불사르고 동쪽으로 진출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었다. 그러한 그가 잔도를 수리하는 것도 이상했지만, 단시일에 완공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는 느긋하게 잔도를 수리한 한군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갑자기 한군이 진창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장감은 황급히 저항했지만 진작부터 철저히 준비한 한군에게 대패했다. 유방은 관중에 진입하자마자 ‘약법삼장’을 발표해 진의 가혹한 법률에 지친 백성들의 마음을 얻은 적이 있었다. 관중의 백성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관중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항우는 화가 치밀었지만, 아직까지 동방에서 혼전을 거듭하고 있었으므로 당장 서쪽으로 이동할 수가 없었다.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졌을 때 유방의 목적은 관중이지 동방진출은 아니라는 낭보가 들렸다. 사실로 믿은 항우는 동방에 집중했다. 동방의 강적은 전영이었다. 상당한 정치력을 지닌 그는 항우에게 불만을 품은 세력들을 결집해 끝까지 저항했다. 항우에게는 유방보다 전영이 더 위험했다.

항우는 산동에서 전영을 대파하고 북해 일대를 장악했다. 전영에 대한 지독한 원한 때문에 점령지에 대한 약탈을 허락했다. 산동 일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포로는 대부분 생매장됐다. 천하를 도모하는 영웅으로서는 도저히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자행했다. 백성들은 누르면 누를수록 더 저항한다. 게다가 산동인의 기질은 ‘산동대한’이라는 말처럼 중국인들 가운데 가장 격렬하다. 산동의 민심은 항우를 등졌다. 항우는 마치 수렁에 빠진 것처럼 산동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동방의 전황은 유방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관중을 수복한 그는 자신이 약속한 ‘약법삼장’을 실행에 옮겼다. 대규모의 원림과 농토가 농민들에게 개방됐다. 수복지역의 민심을 얻고 생산력을 높인 유방은 관중을 자신의 본거지로 다졌다. 항우가 산동의 민심을 잃은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유방의 동방진출이 본격화되자 산동의 항우는 비로소 불안해졌다. 결정적인 사건은 본인은 몰랐지만 사마앙의 문제로 중국사상 최고의 모략가 진평을 내친 것이다. 유방에게 투항한 진평은 다양한 기책을 동원해 항우의 몰락을 재촉했다. 관중에서의 승리로 유방은 수많은 인재를 얻었지만, 산동을 점령한 항우는 수많은 인재와 민심까지 잃었다. 승부는 당사자끼리의 투쟁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초한전의 승부는 사실상 변방인 산동에서 결정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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