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천둥·번개로 하늘이 찢어지며 갈라졌다. 살포시 든 휴일의 낮잠을 깨운 건 쏟아 붓는 장대비였다. 창문을 세차게 휘갈겼다. 몸을 일으켜 창가에 섰다. 뿌연 연무를 퍼뜨리며 쏟아지는 굵은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멍하니 바라보았다. 밝은 태양이 사라진 어두컴컴한 낮이었다.

‘와! 웬 비가 이렇게….’ 하늘이 뚫린 장대비가 얼을 빼놓았다. ‘나’를 빼앗아 갔다. 한동안 그렇게 멍하니 바라보았다. 장대비는 흐느끼며 통곡하며 웃으며 폭소를 터뜨리며 화내며 소리 지르며 외치며 그렇게 줄기차게 쏟아졌다. 뒤죽박죽 뒤섞인 아우성으로 폭포같이 쏟아졌다.

‘왜 이 비는 하필 모두가 들뜬 귀성(歸省)으로 텅 빈 도심 광화문에 이렇게 마구 쏟아지는가. 왜 내 창을 두들기는가. 명절을 맞는 내 착잡한 심사를 시원하게 씻어라도 주겠다는 것인가-.’

빗소리에 짓눌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창문이 부서지는 것 같아 놀라 열린 귀에 들리는 건 뇌성벽력과 빗소리뿐이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오로지 빗소리만 가득했다. 그래서 오히려 온 세상은 적막했다. 조용해졌다. 들끓던 갈등의 소리와 아귀다툼하던 소음들, 골목의 왁자지껄함과 광장을 메우던 함성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기이한 ‘적막(寂寞)’이었다. 장대비가 안겨준 평화였다. 이런 비에는 백수(百獸)의 왕 사자·호랑이들도 숨죽이고 몸을 숨긴다고 했던가. 날짐승들도 바삐 퍼덕이던 날개를 접고-. 가는 나뭇가지를 움켜쥐고 즐거워 촐싹거리며 조잘대던 참새들도 보이지 않았다. 높이 날던 큰 새들도 날개를 접었다. 발치에 치이던 도시 비둘기도, 드문드문 보이던 눈치 빠른 야생 고양이도 종적을 감추었다.

그들은 벌써 알았다. 억수같이 퍼붓는 장대비가 몰려오는 것을 본능으로 예감했다. 이 비가 큰 사고를 칠 것임을 미리 알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일찌감치 편안한 자연의 품으로 안전하게 몸을 피했다. 무모한 인간은 가끔 저항하려 들지만 불가항력일 것이 예견되는 자연의 위력에 그들은 결코 맞서지 않는다. 다소곳하게 순응한다.

섭리가 부여한 본능의 작용이며 거친 자연에서 체득한 학습의 결과다. 그런 그들이 보이지 않았다. 몸을 피했다. 사람과 더불어 살다 떠난 빈자리가 참으로 허전하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새삼 깨달은 것이지만 그들은 결코 인간에게 귀찮은 존재가 아닌 꼭 있어야 할 친구였다.

장대비는 계속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다. 더욱 세차게 창문을 두드렸다. 적막은 그만큼 더 깊어졌다. 빈대떡을 부치거나 그것을 막걸리에 곁들일 생각일랑은 아예 일지가 않았다. 일 수가 없었다. 별식(別食)이 생각나는 그런 여유로운 비가 아니었다. 솔 향기 코끝에 어리는 송편 생각도 없었다. 빗줄기가 무서워졌다. 지표면에 홍수가 일었다.

‘아! 이거 어디선가 또 물난리가 나는 것 아닐까-. 예사 비가 아닌데-. 예보가 또 틀린 것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빗나간 예보를 낸 기상대는 서울 도심에 쏟아지는 물 폭탄의 실황 중계나 하고 있을 뿐이었다.

예보는 명백히 오보였다. 시간이 가고 강수량이 많아지면서 기상대의 예보 수치도 덩달아 올라가고 있었다. 무슨 예보가 이런가. 이럴 거면 차라리 첨단을 자랑하는 과학 장비와 고도의 전문 인력을 믿을 것이 아니라 본능에 의존하는 새나 짐승의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들은 기상위성이나 레이더, 컴퓨터도 없고 인간의 것과 같은 과학적이고 명석한 두뇌를 가진 것도 아닌데 무자비한 자연의 횡포와 변덕을 용케도 잘도 알고 피하지 않는가.

하긴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은 때로 잘못도 하고 실수도 한다. 또 용서받는다. 세계 최고의 과학 기술국가인 미국도 해를 거르지 않고 토네이도, 허리케인에 당하고 또 당하지 않는가. 그렇게 보면 창조주의 영역인 동물을 복제하고 유전자를 해독해내며 깊고 광대무변한 우주의 비경을 들여다보는 인간은 위대하면서 우매하다. 자신을 할퀴고 갈 코앞의 장대비가 어디에 얼마나 쏟아질지도 모르지 않는가. 인간은 우매하고 오만하다. 무모하다.

다시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다보았다. 빗줄기와 홍수가 돼 낮은 곳으로 솰솰 흘러가는 탁류가 눈길을 잡아끌었다. 그 속에 팔을 벌리고 얼굴을 하늘로 향한 채 입을 벌리고 떠들고 웃으며 비를 맞던 어릴 적 내가 있었다.

장면이 다른 빗속인데 눈밭에서 뒹굴던 개구쟁이 내 모습도 있었다. 지나간 굴곡진 세월이 있었다. 오누이가 보였다. 지금은 백수(百壽)를 눈앞에 두었지만 젊었을 적 곱고 자애롭던 어머니가 보였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가자. 차에 기름도 넣고 무엇이라도 좀 사자. 내일 새벽에 뵈러 가야지-’.

이 뒤늦은 부지런함과 장대비 속의 만용, 게으른 외출이 일을 내고 말았다. 낯익고 익숙하게 오갔던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뒷길에서 골동품인 내 차는 계시 받은 ‘노아의 방주’가 아니라 그야말로 구형자동차인 ‘노아의 방주(Noah’s Ark=구형자동차)’가 되고 말았다.

물이 찰랑찰랑했지만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아니었다. 콸콸 분출하고 역류하는 하수, 퍼붓는 장대비와 높은 지대에서 마구 흘러들어오는 물로 금세 호수로 변해 차는 갇히고 엔진은 꺼졌다. ‘아! 이걸 어쩌나.’ 수압에 안 열리는 문을 강제로 열었다. 물이 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아들 같은 전경들의 도움을 받아 높은 데로 차를 밀어 빼내었다. 이미 차는 버렸고 몸은 젖었다. 포기하니 편해졌다. 그때 장대비는 날 보고 흐드러지게 웃고 있었다. 다른 피해들은 마음 아프지만 내 경우는 천재도 인재도 기상대 탓도 아니다. 내 우매하고 무모함 탓이었다. 그날 비가 글쎄 102년 만에 처음 보는 259.5밀리미터가 왔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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