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사암이 지은 ‘선중씨(先仲氏) 정약전(丁若銓) 묘지명(墓誌銘)’에서 해당 내용을 인용한다.

‘갑진년(1784년) 4월 보름날 큰형수의 제사를 지내고 우리 형제가 이덕조(李德操)와 함께 같은 배를 타고 물결을 따라 내려오다가 배 안에서 천지조화의 시초와 육체와 정신, 삶과 죽음의 이치에 대해 듣고 황홀하고 놀랐는데 마치 은하수의 끝없음과 같았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볼 때 사암이 광암의 천주교와 관련된 교리를 들으면서 깊은 관심을 보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770년(영조 46) 9세가 되는 어린 아들을 남겨 두고 모친 해남윤씨(海南尹氏)가 세상을 떠나고 그 이듬해인 1771년(영조 36) 정재원(丁載遠)은 김화현에 사는 황씨라는 여성을 부실(副室)로 삼았으나 요절했으며, 그 이후 1773년(영조 49) 서울에 거주하는 잠성김씨(岑城金氏)를 다시 부실로 삼았다.

여기서 한가치 이채로운 점은 정약용이 서모(庶母)인 잠성김씨에 대해 ‘서모김씨묘지명(庶母金氏墓誌銘)’제하의 글을 남겼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서모김씨는 이벽과 같은 해인 1854년(영조 30)생이며, 사암보다 8세 연상이라 할 수 있는데, 본관은 잠성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의택(金宜澤)의 딸로서 1773년(영조 49) 정재원의 부실이 됐다.

모친의 별세 이후 사암의 외로움을 달래 주기 위하여 맏형수인 경주이씨가 정성을 다했으나 그에 못지 않게 서모김씨도 다산을 정성스럽게 보살폈다는 것인데 이러한 내용을 사암은 ‘서모김씨묘지명’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처음 우리 집에 올 때 용의 나이가 겨우 12살이었다. 머리에 서캐와 이가 많고 또 부스럼이 잘났다. 서모는 손수 빗질해 주고 또 그 고름과 피를 씻어 줬다. 그리고 바지 적삼 버선을 빨래하고 꿰매며 바느질하는 수고도 또한 서모가 담당하다가 장가를 든 뒤에야 그만 두었다. 그러므로 나의 형제 자매 중에서 특히 나와 정이 두터웠다.’

위의 글을 통해 서모김씨가 어린 연령에 모친을 잃은 사암을 마치 친아들 대하듯이 정성을 다해 보살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정약용이 강진에서 귀향한 이후 1813년(순조 13) 세상을 떠난 서모김씨의 묘소를 용진(龍津)의 산골짜기에서 마현(馬峴) 조곡(鳥谷)으로 개장하면서 묘지명을 지었는데 이런 점을 통해 사암이 대학자 못지않게 인간적인 정이 많았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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