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집 몇 채 있던 외딴 마을 ‘판문점’, 평화 외치다
초가집 몇 채 있던 외딴 마을 ‘판문점’, 평화 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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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판문점 전경ⓒ천지일보 2018.9.16
초기 판문점 전경ⓒ천지일보 2018.9.16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사진展

판문점 초기 모습부터 공개

‘정전·분단·평화’ 주제 담아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 같은 정신도 신라 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

박봉우 작가의 시 ‘휴전선(1956)’의 일부분이다. 짧은 글이지만 남북의 안타까운 상황을 대변해 주고 있는 듯하다. 지난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면서 소통의 장으로서의 판문점에 관심이 커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판문점이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남북정상회담까지의 주요 모습이 ‘판문점, 분단 속 평화를 꿈꾸다’ 기획 사진전을 통해 공개됐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부출입구 전시실에서 10일부터 열린 전시는 박물관이 소장한 다큐멘터리 사진가(김녕만, 전민조, 존 리치, 구와바라 시세이)의 사진을 중심으로 꾸며졌다.

판문점 남북 경비병 (제공: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천지일보 2018.9.16
판문점 남북 경비병 (제공: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천지일보 2018.9.16

◆휴전회담 개최로 전세계 알려져

역사문헌에 따르면, 판문점 일대는 고려시대 송림현(松林縣) 지역이었다. 조선 태종대에 장단군에 편입됐고 송림현의 남쪽이라는 뜻으로 송남면으로 불리게 됐다. 일제강점기에는 개성군의 일부 지역과 합쳐 장단군 진서면이 됐다.

판문점은 ‘널문리’라고도 불렸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이 지역이 개성부 판문평(板門平)으로 기록돼 있는데, 이 부근에 널문다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설과 이 마을에 널빤지로 만든 대문(널문)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널문리라고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6.25전쟁 전만해도 이곳은 초가집 몇 채만 있던 외딴 마을이었다. 그러다 1951∼1953년 휴전회담이 열리면서 전 세계에 알려졌다. 1953년 7월 이곳에서 휴전협정이 조인된 뒤 국제연합 측과 북한 측의 ‘공동경비구역’이 됐으며, 그해 8∼9월에는 1개월에 걸친 포로교환이 이뤄지기도 했다. 현재 이곳은 남북회담장소와 남북의 왕래를 위한 통과지점으로 활용되고 있다. 전쟁 후 남북이 대화를 시작한 1971년부터 현재(2018년 7월)까지 이뤄진 667회의 회담 가운데 371회가 판문점에서 열렸다.

전시를 관람하는 시민들 ⓒ천지일보 2018.9.16
전시를 관람하는 시민들 ⓒ천지일보 2018.9.16

◆분단과 평화 메시지 전해

전시는 판문점이 상징하고 있는 ‘정전’ ‘분단’ ‘평화’의 역사를 세 개의 부로 진행됐다. 먼저 ‘정전의 현장’은 정전협상이 진행된 판문점의 초기 모습을 담고 있다. 사진 속에는 넓은 대지 가운데 초가집 몇 채와 임시천막이 세워져 있다. 정전협정문의 서명이 이뤄지는 목조로 된 회담장을 짓고 있는 모습도 사진에 담겼다. 공산 측과 유엔 측 기자들은 서로의 모습이 신기한 듯 사진으로 담아내고 있었다.

‘분단의 경계’는 남북이 대립하고 있는 분단의 공간으로서의 판문점을 담아냈다. 군사분계선을 가운데 두고 배치하고 있는 남북 경비원. 서로 다른 군복을 착용하고 서로를 예의주시하고 있어 긴장감이 역력하다. 한 핏줄이지만 대치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한 장의 사진이 대변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판문점은 평화를 꿈꾸는 장소이기도 했다. 서로를 바라보는 남북적십자 연락관의 모습,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남북이 악수하는 모습은 남북 정상이 판문점 중앙에서 서로를 바라보던 모습도 연상케 한다. 비록 아직 한반도의 긴장과 대립은 끝나지 않았지만, 사진은 판문점 안에 담긴 평화와 공존을 느낄 수 있게 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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