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중경담판(重京談判)
[고전 속 정치이야기] 중경담판(重京談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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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1945년 8월,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자 중국의 국내정세가 급격히 변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로 동북, 대만, 팽호를 되찾은 중국정부는 동삼성을 9개의 성으로 분할하고, 대만과 팽호를 합해 대만성을 설치했다. 1945년 5월, 남경으로 환도한 국민정부는 11월에 국민대회를 열어 헌법제정에 착수했다. 이듬해 1월 ‘중화민국은 삼민주의를 기본으로 민유(民有), 민치(民治), 민형(民亨)의 민주공화국’임을 정식으로 선포했다. 1947년 4월, 국민대회에서는 장개석을 총통, 이종인을 부총통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항일전쟁에서 공동전선을 펼쳐왔던 중국공산당은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화북과 화중 일대에서 세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장개석은 종전과 동시에 미국의 지원을 받아 공산당원과 팔로군을 상대로 내전을 일으켰다. 그러나 공산당과 팔로군이 점령한 ‘해방구’의 무력이 생각보다 강했고, 종전 이후 대다수의 중국인들이 내전에 반대하면서 평화와 민주를 강력하게 요구했으며, 국제적인 조건도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장개석은 당장 전면전을 펼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시간을 끌다가는 이 숙적을 제거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내전을 유발하기 위해 ‘강화담판’을 시도했다. 1945년 8월 모택동에게 3차례 전보를 보내 중경담판을 제안했다. 모택동은 교묘한 전략가였다. 평화담판을 거부하면 성의를 저버렸다는 비판을 감수해야 한다. 모택동은 모험을 각오했다.

장개석은 감히 모택동이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안을 거절하면 책임을 공산당에게 돌리고 곧바로 내전에 돌입하려고 생각했다. 모택동이 호응하자, 장개석은 자신의 입장이 피동적으로 변했다고 느꼈다. 1945년 8월 28일, 중경에 도착한 모택동은 다음날 바로 담판을 요구했다. 국민당 대표는 모택동을 환영했지만, 항일전쟁 과정에서 팔로군과 신사군이 국민당 군대를 기습한 것을 지적했다. 공산당 대표는 내전의 음모를 들추면서 반격했다.

모택동과 장개석의 직접담판이 벌어졌다. 장개석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핵심은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지만, 모택동은 집요하게 국내 문제 해결에 대한 공산당의 입장을 천명했다. 주은래도 국민당 대표와 평화적 해결에 대한 구체적 절차에 대해 협상을 진행했다. 장개석은 연일 파티를 열어 담판을 무산시키면서 몰래 국민당 내부 강경파를 동원해 공산당 해방구를 공격했다. 회담을 유리하게 끌려는 시도였지만, 공산당도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9월에서 10월 사이, 중공군은 장가구, 상당, 한단에서 국민당군을 격퇴했다. 이 세 차례의 전투로 중경담판을 진행하던 공산당은 장개석의 군사행동계획을 일단 저지할 수 있었으며, 지금까지 그의 평화공세가 거짓이었음을 국내외에 폭로할 수 있었다. 

군사행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장개석은 회담석상에서 최대한의 ‘성의’를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평화단결을 승인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본격적인 강화회담을 계속했다. 43일간 계속된 회담에서 양 진영은 국공쌍방협정을 체결했다. 모택동은 연안으로 돌아가고, 주은래를 대표로 하는 공산당과 국민당은 회담을 계속 진행해 1946년 1월,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장개석의 입장에서 쌍방협정이나 정전협정은 다급한 나머지 불가피하게 취했던 완병지계(緩兵之計)’에 불과했다. 그는 협정서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곧바로 육·해·공군을 동원해 동북과 화북의 공산당 본거지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1946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그는 전국적인 규모의 공산당 소탕작전을 개시했다. 그러나 중경담판이 그의 계략이었음이 드러나자 중국인들은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미국의 도움은 장개석에게 그리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는 결국 대만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문제는 국민의 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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