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현배 시인, 역사 칼럼니스트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 로마를 세우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8.9.13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 로마를 세우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8.9.13

아이네이아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에서는 아이네이아스를 트로이군에서 헥토르 다음가는 영웅으로 그려 놓았다. 그리스의 명장 디오메데스, 아킬레우스와 일대일 싸움을 벌일 만큼 용감무쌍했으며 그리스 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가 함락되기 직전 성을 탈출하여,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과 가족을 이끌고 트라키아․크레타멜로스․시칠리아 등 여러 곳을 떠돌아다녔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오랜 옛날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는데, 기원전 30년쯤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아이네이아스의 전설을 소재로 하여 서사시 ‘아이네이아스’를 썼다. 이 작품은 1부와 2부로 나뉜다. 1부에서는 트로이를 탈출한 아이네이아스가 풍랑을 만나 카르타고에 가 디도 여왕과 사랑을 나누는 등, 방랑과 모험을 벌인 끝에 이탈리아 땅에 닿을 때까지의 이야기다. 그리고 2부는 아이네이아스가 라티움을 정복하고 로마 건국의 기초를 닦는 이야기다.

베르길리우스는 왜 이런 작품을 썼을까? 당시 로마의 황제는 아우구스투스였다. 로마의 황제는 신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신들의 계보가 필요했다. 하지만 로마에는 로마의 건국 신화가 없었다. 그래서 ‘일리아드’의 영웅인 아이네이아스를 끌어들여 로마의 창시자인 로물루스의 선조로 만드는, 로마 사람들만의 건국 신화를 베르길리우스가 쓰게 된 것이다.

이로써 로마 황실은 이 신화 덕에 여신 아프로디테로 거슬러 올라가는 신들의 계보를 가질 수 있었다. 아이네이아스는 아버지 안키세스, 어머니 아프로디테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아이네이아스에서 로물루스로 이어지는 로마의 건국 신화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트로이 성을 탈출하여 온갖 모험과 고난을 겪은 아이네이아스는 드디어 이탈리아 땅에 닿았다. 아이네이아스가 첫발을 내딛은 이탈리아 땅에는 라티움이란 나라가 있었다. 라티움의 왕 라티누스는 자신의 딸 라비니아를 아이네이아스와 결혼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라비니아는 루툴리아의 왕인 투르누스를 약혼자로 두고 있었다. 투르누스가 반발하여 군대를 이끌고 라티움으로 쳐들어왔다.

아이네이아스는 에트루리아의 지원을 받아 투르누스와 전쟁을 벌여 끝내 승리를 거두었다. 이리하여 아이네이아스는 라비니아와 결혼하여 이탈리아의 티베르 강 근처에 라비니움이란 나라를 세웠다. 이 나라는 뒷날 그의 후손이 건설할 로마 제국의 모태가 되는 나라다.

로마를 상징하는 것 중 하나인 콜로세움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8.9.13
로마를 상징하는 것 중 하나인 콜로세움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8.9.13

아이네이아스의 후손이 로마를 세운 것은 그로부터 400년쯤 지난 뒤였다. 아이네이아스의 후손 가운데는 누미토르와 아물리우스 형제가 있었다. 동생인 아물리우스는 아버지 프로카 왕이 세상을 떠나자 형 누미토르에게서 왕위를 뺏은 뒤 왕자인 누미토르의 아들을 죽여 버렸다. 그리고 후환을 없애려고 누미토르의 외동딸인 레아 실비아를 베스타 신전의 사제로 만들었다. 사제가 되면 결혼을 할 수 없었으니, 누미토르의 대를 끊어 놓기 위한 꼼수였다.

그러나 레아 실비아는 전쟁의 신 마르스와 사랑을 하여 쌍둥이 형제를 낳았다. 이 사실을 안 아물리우스는 크게 노하여 레아 실비아를 죽이고 쌍둥이 형제를 티베르 강에 버리게 했다.

쌍둥이 형제를 담은 광주리는 강물을 떠내려가다가 강가 무화과나무 가지에 걸려 멈추었다. 그때 강가에는 어미 늑대 한 마리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늑대는 아기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아기들을 구해 주었다. 늑대는 아기들을 해치기는커녕 동굴로 데려가 젖을 먹여 주었다. 그 때 어디선가 딱따구리가 날아와 아기들에게 과일을 따다 주었다.

쌍둥이 형제는 늑대의 젖을 먹고 무럭무럭 자랐다. 어느 날 양치기 파우스툴루스가 쌍둥이 형제를 발견하여 집에 데려다 길렀다. 파우스툴루스는 형제에게 로물루스, 레무스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양치기의 집에서 어려서부터 무술을 배워 무술이 뛰어난 젊은이로 자라났다. 그들은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들을 부하로 거느리고 양치기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어느 날 쌍둥이 형제는 자신들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복수를 다짐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자기들을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라비니움의 수도인 알바롱가로 쳐들어간 것이다. 결국 이들은 아물리우스 왕을 죽여 어머니의 원수를 갚았으며, 외할아버지 누미토르를 왕으로 모셨다.

그러나 형제는 알바롱가에서 살지 않았다. 자기들을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티베르 강가로 돌아왔다. 늑대가 형제를 구해 주었던 곳에 새로운 도시 국가를 세우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형제는 수도를 어디로 정하느냐를 놓고 의견이 갈렸다. 로물루스는 팔라티누스 언덕이 좋다고 했는데, 레무스는 아벤티누스 언덕을 고집하는 것이다. 의견이 좁혀지지 않자 형제는 새점을 쳐서 결정하기로 했다. 두 언덕에서 새를 많이 본 사람이 이기는 것으로 했다.

새점을 쳐 보니 로물루스는 팔라티누스 언덕에서 독수리 열두 마리를 보았다. 그에 비해 레무스는 아벤티누스 언덕에서 독수리 여섯 마리를 보았다. 이리하여 로물루스가 이겨 수도는 팔라티누스 언덕으로 정했으며, 로물루스는 자기 이름을 따서 도시 국가의 이름을 ‘로마’라고 불렀다. 이때가 기원전 753년 4월 21일이었다.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도시 국가 이름과 통치권을 놓고 심하게 다투었다. 그러다가 싸움이 커져 로물루스가 레무스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늑대의 젖을 먹는 쌍둥이 형제 조각상은 오늘날 로마 시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로마 박물관에는 쌍둥이 형제를 기른 어미 늑대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만든 이 청동 조각상이 전시되어 있다.

늑대의 젖을 먹는 쌍둥이 형제 조각상은 오늘날 로마 시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8.9.13
늑대의 젖을 먹는 쌍둥이 형제 조각상은 오늘날 로마 시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8.9.13

◆ “사람의 아이를 어미 늑대가 기른 이야기가 또 있나요?”

인도에는 원하지 않는 아이가 태어나면 숲속에 내다버리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그 아이를 거두어 어미 늑대가 젖을 먹여 길렀다는 이야기가 인도에서 많이 전해지고 있다.

1920년 미드 노포르의 숲속에서 어미 늑대 한 마리가 사냥꾼의 총에 맞아 죽었다. 그런데 그 어미 늑대의 동굴 속에 새끼 늑대 두 마리와 사람의 여자 아이 두 명이 발견되었다. 아이들은 늑대처럼 네 발로 다녔으며, 불에 굽지 않은 생고기를 뜯어먹었다.

아이들은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돌아왔다. 언니에게는 카말라, 동생에게는 아말라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으며, 고아원에서 살게 되었다. 하지만 아말라는 문명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곧 죽고 말았다. 카말라는 아말라보다 9년을 더 살았는데, 말을 쉽게 배우지 못했다. 쓸 수 있는 단어가 30개밖에 안 되었다. 카말라는 보통 사람처럼 두 발로 서는 데도 3년이나 걸렸다. 옷을 입혀도 얼른 벗어 던졌고, 벌거벗은 채 네 발로 뛰어다녔다. 똥오줌을 가리지 못해 아무데나 누기 일쑤였다고 한다.
 

경주는 두 마리 또는 네 마리 말이 끄는 전차 경주로 나누었다. 4.5킬로미터쯤 되는 경기장 일곱 바퀴를 돌아, 맨 먼저 결승점을 통과한 전차가 우승을 차지하는 것으로 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8.9.13
경주는 두 마리 또는 네 마리 말이 끄는 전차 경주로 나누었다. 4.5킬로미터쯤 되는 경기장 일곱 바퀴를 돌아, 맨 먼저 결승점을 통과한 전차가 우승을 차지하는 것으로 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8.9.13

로마인들을 열광시킨 전차 경주

전차 경주는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달리는 경주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는 전차 경주에 관한 기록이 있다. 영웅 아킬레우스가 친구 파트로크루스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를 애도하는 뜻에서 전차 경주를 벌였다. 이 전차 경주에는 상품도 내걸었다. 1등에게는 미녀, 2등에게는 암말, 그 밖의 입상자에게는 솥․금화․그릇을 주었다. ‘일리아드’에는 전차 다섯 대가 출전하여 벌이는 멋진 경주 장면을 생생하게 그려 놓았다.

전차 경주는 고대 그리스에서 올림픽 정식 종목이었다. 네 마리 또는 두 마리 말이 끄는 전차 경주가 벌어져 그리스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올림픽은 4년에 한 번 열리기 때문에 그리스 사람들은 전차 경주를 자주 즐기지 못했다. 오히려 전차 경주를 자주 즐기고 열광적으로 좋아한 것은 고대 로마 사람들이었다. 로마에서는 전차 경주 전용 경기장이 있어 전차 경주가 축제일마다 열렸다. 로마 사람들은 이런 시설을 ‘키르쿠스’, 즉 ‘서커스’라고 했다. 서커스는 전차 경주를 벌이는 타원형의 코스를 뜻한다.

로마에서 가장 큰 경기장은 키르쿠스 막시무스였다. U자형 구조로 삼면에 석조 계단형 좌석을 놓았다. 기원전 1세기인 카이사르 때는 15만 명이 들어갈 수 있었는데, 4세기인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 증축하여 25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었다.

경주는 두 마리 또는 네 마리 말이 끄는 전차 경주로 나누었다. 4.5킬로미터쯤 되는 경기장 일곱 바퀴를 돌아, 맨 먼저 결승점을 통과한 전차가 우승을 차지하는 것으로 했다.

한 경기에 보통 전차 4~6대가 출전했는데, 사고가 자주 나서 아주 위험했다. 마차끼리 서로 부딪쳐 다치거나 죽는 사람들이 많았다.

전차 경주는 녹색․청색․적색․백색의 4개 팀으로 나뉘어 벌어졌다. 기수는 자기 팀 색깔의 경기복을 입고 출전했으며, 관중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팀을 응원했다. 황제와 황족들은 녹색이나 청색 팀을 응원했다고 한다.

관중들 중에는 열성 팬도 있어 자신이 지지하는 팀을 열렬히 응원했다. 때로는 다른 팀을 비난하며 그 팀의 팬들을 두들겨 패기도 했다.

적색 팀에 펠릭스라는 전차 기수가 있었다. 그는 전차 경주에서 우승을 많이 하여 인기가 높았는데, 어느 날 경기 중에 사고로 죽고 말았다. 충격에 빠진 한 열성 팬은 장례식에 참석해 펠릭스의 시신을 화장할 때 불속으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전차 경주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하루 12회의 경기를 했는데, 플라비우스 황제 때는 하루 100회의 경기를 할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전차 경주는 4세기경 로마가 멸망의 길로 들어서면서 점차 사라져 갔다.
 

로마인들을 열광시킨 전차 경주를 형상화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8.9.13
로마인들을 열광시킨 전차 경주를 형상화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8.9.13

◆ “전차 경기 기수는 어떤 사람들이 맡았나요?”

전차 경기 기수는 대부분 노예 신분이었다. 이들은 경기가 열리는 날에는 하루에도 여러 번 경기에 참가해야 했다. 1000번 이상 우승한 기수는 ‘밀리아리’라 부르며 영웅 대접을 했다. 관중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며 돈을 많이 벌었다.

전차 경주의 전설적인 영웅은 이베리아 반도 출신인 디오클레스였다. 그는 24년 동안 기수로 일하다가 42세에 은퇴했는데, 4,257번 전차 경주에 출전하여 1,462번이나 우승을 했다고 한다. 그가 상금으로 받은 돈은 모두 3500만 세스테르티우스였다. 디오클레스의 열성 팬들은 그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그 비석에는 화려한 우승 기록과 상금 내력을 밝혀 놓아, 디오클레스를 전차 경기 최고의 기수로 치켜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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