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입자장 박창영 선생이 갓을 들어 보이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입자장 박창영 선생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16세기 말 조선중기 문신이었던 약포 정탁(1526~1605)은 차양(양태) 지름만 60.5㎝에 달하는 갓을 쓰고 다녔다. 보물 494호로 지정된 이 갓의 원형은 오랜 시간이 흘러 손끝만 살짝 대도 금세 으스러진다. 재채기라도 나올까 코와 입을 손으로 막으며 약포 정탁의 갓을 보노라면 다른 갓보다 입자장의 섬세한 솜씨를 엿볼 수 있다.

약포 정탁의 갓은 일반 갓보다 양태가 넓어 요즘 같이 따가운 볕을 잘 막아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세죽사(細竹絲, 가느다란 대나무 실)로 갓에서 위로 볼록 솟아난 총모자의 윗부분을 일직선으로 이은 방법과 달리 둥글게 촘촘하게 이은 것이 눈에 띈다. 우리 고유의 멋, 곡선의 미학을 잘 나타냈다. 부서질 것을 방지, 유리관에 담긴 약포 정탁의 갓이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입자장 박창영 선생의 손에서 올곧이 다시 태어났다.

박창영(68) 선생은 주로 우리 선조들이 쓰던 갓을 복원 및 재현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이렇게 복원된 갓들 중 3년 전에 다시 세상의 빛을 본 약포 정탁 갓은 그가 매우 아끼는 작품이다. 박 선생의 말을 빌리면 그는 제작과정에 심혈을 기울였을 뿐 아니라 자신의 뒤를 잇는 아들 박형박 이수자가 복원 과정기록을 세세히 남겨 유달리 애착이 간다.

그에게 있어 갓을 만드는 과정(갓일)은 단순 생계유지 수단으로 그치지 않는다. 4대째 이어진 가업이기도 하지만 옛 갓을 복원하면서 당시 선비들의 풍류를 느낀다.

“갓마다 제각각의 모양을 지니고 있어요. 구한말에 들어서면서 서양 모자처럼 양태가 좁은 것도 있고, 약포 정탁이나 조선시대 왕들이 쓴 갓처럼 양태가 넓은 갓도 있습니다. 총모자의 둘레와 높이도 각양각색입니다. 유행에 신경 쓰지 않았을 것 같은 선비도 사실 멋을 즐겼다는 것을 알 수 있죠.”

▲ 서울 금천구 독산동에 위치한 입자장 박창영 선생의 갓방. 이곳에서 박 선생과 큰 아들 박형박 씨가 함께 옛 갓을 재현한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박 선생의 고향은 예천군 돌티마을(천북동)이다. 갓의 생산지로 유명한 이 마을에는 입자장이 여럿 있었다. 유년시절만 하더라도 갓 하나의 값은 쌀 다섯 가마니 정도여서 대부분의 마을사람들이 이 일에 집중했다. 가업이 전승되다 보니 어린 시절 그도 어깨너머로 갓일을 자연스레 배웠다.

“10대 후반부터 갓일을 본격적으로 배워 25세 즈음 고향에 갓방을 차려 운영했어요. 하지만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수요가 급격히 줄어 막막했습니다. 그때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사극을 보면서 아이디어가 번득 떠올랐죠. ‘방송국에 납품하면 되겠구나’라구요.”

1978년에 상경한 그는 KBS 국장을 만나 “내가 만든 갓을 써 달라”고 요청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사극이나 영화에 나오는 주요 인물의 갓은 거의 박 선생의 작품이다. 영화 ‘스캔들’의 주인공 배용준이 쓰고 나온 갓과 KBS 1TV 드라마 ‘거상 김만덕’ 등에 나온 것들이 대표적이다.

“원래 갓일은 혼자서 하는 게 아니라 협동 작업입니다. 총모자와 양태, 입자로 분업화돼 있어요. 그래서 말총과 대나무로 엮는 총모자장과 차양을 만드는 양태장, 이 둘의 잡고 조립한 후 명주를 입히고 옻칠을 하는 입자장이 있죠. 이제는 갓일을 하는 분들 수가 점점 줄다 보니 분업이 불가능합니다. 입자장은 저를 포함해 두 명인데, 갓일을 전업으로 삼는 사람은 제가 유일해요.”

박 선생은 가업의 가장 큰 사명으로 우리 옛 갓을 복원 및 재현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갓을 만드는 시간도 거의 여기에 쓰인다. 약포 정탁의 갓 외에도 궁중유물전시관에 소장된 철종 어진에 나오는 갓인 전립을 비롯해 사대부들이 썼던 박쥐모양 갓과 국상 때 쓰인 백립 등을 재현했다.

이렇게 복원과 재현을 목적으로 하는 갓은 1년 정도 씨름해야 완성된다. 유물을 찾아다니면서 이리저리 관찰하는 것부터 머리카락만큼 얇게 대나무 실을 내야 하는 등 전 과정을 홀로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갓의 멋에 취한 사람들이 갓일을 배우기 위해 종종 박 선생을 찾아온다. 그들은 겉멋이 아닌 진심으로 갓일을 배우고자 한다. 하지만 열이면 열 모두 포기하고 되돌아갔다.

오랫동안 앉아서 섬세한 손길을 요하는 작업을 모두 익히려면 적게는 10년 정도 걸린다. 아울러 공정에서 화로에 담긴 숯으로 인두질을 해야 하기 때문에 땀을 뻘뻘 흘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갓일을 배우려 하는 사람이 없다.

▲ 갓방에 걸린 양태. ⓒ천지일보(뉴스천지)
금천구 독산동 2층 주택. 1층으로 내려가면 옻칠 냄새가 가득한 박 선생의 갓방(공방)이 있다. 예전에는 갓방이 그의 고유 공간이었지만 이제는 큰 아들 박형박(36) 이수자가 함께한다.

“아들은 갓으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제가 기술부분에서 체계를 쌓았다면, 아들은 기술에 대한 이론을 정리하고 있어요. 게다가 이번에 아들이 약포 정탁의 갓을 저보다 더 촘촘하게 만들었습니다. 젊으니까 저보다 눈이 밝은 점도 있겠고, 눈짐작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몇 센티미터인지 길이며 둘레며 정확히 따져서 만드니까 정교하죠. 아들이 자랑스럽습니다.”

박 선생은 습하고 더운 여름엔 갓일을 1달 정도 쉰다. 화로에 담긴 숯이 너무 뜨거워 인두질을 못할뿐더러 습한 공기로 빳빳하게 갓을 말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더 좋은 재료를 구한다든지 쉴 틈 없이 여기저기 뛰어다닌다.

“과거 선조들이 쓰고 다닌 갓은 지금 만들어진 것보다 뛰어납니다. 갓을 찾는 사람들은 없지만 그 멋을 널리 알리기 위해 질 좋은 대나무를 구하는 등 갓일을 손에서 뗄 수 없습니다.”

아들과 함께 갓일을 하는 그에게서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후원: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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