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9세라는 어린 연령에 모친을 잃은 사암(俟菴)이었지만 큰형수가 되는 정약현(丁若鉉)의 부인 경주이씨(慶州李氏)가 모친의 역할을 대신해 줬는데 사암은 당시의 상황을 “맏형수 공인(恭人) 이씨(李氏) 묘지명(墓誌銘)” 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몇년 뒤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니, 약용이 그때 9세였다. 머리에 이와 서캐가 득실거리고 때가 얼굴에 더덕더덕하였는데 형수가 날마다 힘들여 씻기고 빗질해주었다. 그러나 약용은 몸을 흔들며 벗어나려고만 하면서 형수에게로 가려 하지 않았다.

형수는 빗과 세숫대야를 들고 따라와서 어루만지며 씻으라고 사정했다. 달아나면 잡기도 하고 울면 놀리기도 했다. 꾸짖고 놀려대는 소리가 뒤섞여 떠들썩하니 온 집안이 한바탕 웃고 모두가 약용을 밉살스럽게 여겼다. 

이와 같이 모친을 잃은 다산의 빈자리를 채워 줄려고 정성을 다하였던 경주이씨가 정재원(丁載遠)이 예천군수로 재임중에 그 곳에서 세상을 떠나니 때는 1780년(정조 4) 4월 15일이었다.

이러한 경주이씨의 별세(別世)에 사암으로서는 모친의 상(喪) 못지 않게 큰 슬픔에 빠졌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경주이씨의 동생이 한국천주교회의 선구자로 알려진 광암(鑛菴) 이벽(李壁)이었다는 점을 주목한다.

그렇다면 이벽(李檗)은 어떤 계기로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게 됐는지 그 내력을 소개한다.

거슬러 올라가서 광암(鑛菴)의 5대조 이경상(李慶相)이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청나라의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스승으로서 청나라에서 8년동안 체류하고 귀국하는 과정에서 예수회 아담 샬 신부로부터 서학관련 서적을 가지고 온 것이 그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데 평소 학구열(學究熱)이 강했던 광암이 이러한 서적들을 읽으면서 서학에 대하여 서서히 눈을 뜨게 되면서 결국 천주교에 대한 관심으로 까지 승화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사암(俟菴)과 광암(鑛菴)은 사돈관계이었는데 사암이 1762년(영조 38)생이요 광암이 1754년(영조 30)생이니 사암이 광암보다 8세 연하가 됐는데 광암은 사암이 태학생(太學生)으로 있던 시절, 학문적인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1784년(정조 8) 4월 15일 마재에서 정약현의 부인이 되는 누이 경주이씨 기제(忌祭)에 참석한 이후 그 이튿날, 서울로 가기 위해 배를 타면서 동행한 사암의 형제들에게 천주교의 교리를 전파했는데 이는 사암이 천주교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중요한 계기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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