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재욱 충남대 명예교수

 

동창 모임에서 겉모습으로 보아 다른 동기들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10년 이상 젊어 보이는 친구도 있다. 그렇다면 다른 친구들보다 10년 이상 젊어 보이는 친구가 그만큼 더 오래 살 수 있는 것일까.

세월이 흐르며 얼굴이나 몸에 노화가 곁들여지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며, 몸에 간직되는 생물학적 나이는 연령과 같게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똑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일란성 쌍둥이도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지냈느냐에 따라 노화 정도가 다르게 나타난다. 이는 겉모습으로 나타나는 세월의 두께가 식습관이나 일상의 생활태도와 같은 환경에 따라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우리 몸은 60조개가 넘는 세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세포의 핵 안에는 유전자인 DNA를 간직하고 있는 염색체가 46개씩 들어 있다. 수정을 통해 정자와 난자로부터 23개씩을 물려받은 46개의 염색체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전정보가 담겨 있다.

그래서 자녀들이 부모의 모습과 성격을 닮게 되는 것이다. 세포의 핵 안에 담겨 있는 유전자 전체는 유전체(게놈, Genome)라고 부른다. 세포 하나에 간직돼 있는 모든 유전정보를 한 편의 연극 각본에 비유해볼 때, 세포의 염색체에 간직돼 있는 유전체는 각본 전체의 내용으로 볼 수 있다. 각본에 쓰여 있는 내용은 임의로 바꾸기 어렵지만 연출자와 출연 배우가 어떻게 연기하느냐 따라 관객에게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유전체에 간직돼 발현되는 유전정보도 언제, 어떤 원인에 의해 어떻게 작동되느냐에 따라 다르게 발현될 수 있다.  

최근 유전자인 DNA의 염기서열이 변하지 않아도 유전자 발현에 변화가 나타날 수 있음이 밝혀지며, 유전자의 발현을 통해 나타나는 생명현상이 유전자만으로 설명이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나무줄기에 그 나무의 수명을 보여주는 나이테가 있는 것처럼 사람의 염색체에 간직돼 있는 생명의 본질인 유전자(DNA)에도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는 ‘유전자 나이테’가 있다. 이런 유전자 나이테에 간직돼 염기서열의 변화 없이 발현되는 유전  현상은 ‘후성유전(後成遺傳)’이라 부르며, 이를 연구하는 분야가 후성유전학(Epigenetics)이다. 

유전체에 간직돼 있는 유전자는 부모로부터 물려받기 때문에 자신의 선택권 밖에 있지만, 세상에 태어나 자신이 선택하는 습관이나 경험 그리고 환경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 후성유전의 작동 양식도 자손들에게 유전될 수 있다. 

후성유전의 실례로 산모가 임신 중 입덧으로 영양섭취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태아가 그 영향으로 영양 부족을 느껴 많이 먹음으로써 살이 찌는 체질로 태어날 수 있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는 유전적 변이는 없지만 태아 시절에 겪은 제한적 영양 공급을 최대한 극복하는 후성유전 프로그램이 작동해 비만아로 자랄 확률이 높아지게 되는 것이다.  

후성유전으로 유전자 발현의 조절이 변하면 당뇨, 암, 치매, 심혈관계 질환 또는 정신분열증 등 다양한 질병이 유발될 수도 있다. 최근 유전병과 후성유전의 상호관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후성유전학이 치료약 개발이나 삶의 질 개선에 중요한 연구 분야로 대두되고 있다. 대장암 세포에서 DNA 메틸화에 의해 후성유전적으로 조절되는 유전자가 발견돼 대장암 환자에게서 암의 재발 예후를 측정할 수 있는 바이오마커로 이용될 수 있다는 보고도 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유전자 나이테로 세포 내에 남겨진 후성유전의 흔적을 분석하면 실제 나이와 다른 몸 나이의 추정이 가능한데, 이는 ‘후성(後成)나이’라고 부른 다. 후성나이는 실제 나이와 일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조로증(早老症) 환자에서처럼 연령의 가속화 현상에 의해 후성 나이가 더 많게 나타날 수 있다. 연령의 가속화는 암이나 심혈관 질환과 같은 질병의 발생률을 높여주는 데 반해 연령의 가속화가 늦추어지면 노화가 지연되며 장수에 이를 수 있다.

‘건강 유전자’에 영향을 미쳐 후성나이를 변화시키는 요인들로는 식생활, 환경, 신체 활동, 스트레스, 수면 습관 등을 들 수 있다. 삶을 살아가며 내 몸에 남겨질 ‘유전자 나이테’와 ‘후성나이’를 생각하며, 연령의 가속화 속도를 늦추며 건강하게 장수하는 생활습관을 길들여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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