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관동대지진 대학살로 시신이 쌓여 있는 모습 (제공: 정성길 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18.9.8
일본의 관동대지진 대학살로 시신이 쌓여 있는 모습 (제공: 정성길 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18.9.8

관동대지진 사건 95주기
미공개 사진 추가 단독공개
제노사이드 인정돼야 할 사건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사건 95주기를 맞아 관련 미공개 사진 포함 4점을 추가로 공개한다.

사진은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대지진 발발 당시 기상청 건물시계가 오전 11시 58분을 가리킨 상황에서 멈춰 있는 모습이다. 도쿄,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일본 관동 지역에 진도 7.0이상의 초강력 지진에 이곳의 모든 활동이 중단되는 동시에 시간도 멈춰버린 것이다. 땅이 크게 갈라진 모습과 사람들이 건물 밖 거리로 빠져나온 가운데 곳곳에 화재가 발생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발발하면서 일본 기상청 시계가 오전 11시 58분 상태로 멈춰 있다. (제공: 정성길 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18.9.8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발발하면서 일본 기상청 시계가 오전 11시 58분 상태로 멈춰 있다. (제공: 정성길 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18.9.8
사람들이 건물 밖 거리로 빠져나온 가운데 곳곳에 화재가 발생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제공: 정성길 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18.9.8
사람들이 건물 밖 거리로 빠져나온 가운데 곳곳에 화재가 발생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제공: 정성길 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18.9.8
광동대지진으로 땅이 심하게 갈라진 모습 (제공: 정성길 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18.9.8
관동대지진으로 땅이 심하게 갈라진 모습 (제공: 정성길 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18.9.8

95년 전 발생한 지진으로 일본 관동지역은 건물이 무너지고 화재가 발생하는 등 대부분 폐허가 될 정도로 피해가 심각했다. 당시 이 지진은 일본의 경제가 좋지 않은 공황상태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민심의 추락은 상당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곧바로 계엄사령부를 설치하고 지진으로 인한 경제파탄으로 울분이 터진 민심을 달래기 위해 희생양을 조선인으로 돌렸다.

일본 계엄사령부는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 ‘조선인이 방화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등으로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계엄사령부는 언론에 거짓으로 흘려 일본 민심을 자극시키게 했고, 무전과 전단, 포스터 등을 이용해 유언비어를 유포시킴으로써 관동 일대 조선인들이 숨을 곳이 없도록 했고, 형무소에 수감 중인 죄수들까지 다 내보내 자경단을 구성하도록 해 대학살을 자행하도록 부추겼다.

자경단의 마구잡이 조선인 사냥에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일부 죽기도 했으나 조선인의 피해는 엄청났다. 이들에 의해 학살된 조선인은 독립신문에서는 6천여명으로 발표됐으나 독일 문헌에서는 2만 3000명 이상으로 기록됐다. 사진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시신들이 마치 쓰레기더미처럼 쌓여 있다.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사진일 수밖에 없다.

대학살은 9월 3일부터 8일 정도까지 이어졌고, 발음이 부정확한 일본인도 살해되는 등 자경단의 만행이 도를 넘어서자 그제야 치안유지를 위해 계엄령을 선포해 사건을 종결시켰다. 그러나 무전 등으로만 전달됐기 때문에 지시를 늦게 전달받은 지역에서는 계엄령 선포 후에도 열흘간 학살이 이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이 종결될 때까지 일본정부는 언론을 검열해 이번 사건과 관련된 기사가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종결 후에는 일본의 일부 의식 있는 언론들이 이번 사건에 대해 알아봤고, 결국 잘못된 유언비어에 의해 많은 조선인이 무고하게 희생됐다는 사실을 알아내 기사와 사설 등으로 언론에 내보냈다.

이 같은 제대로 된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에서는 교과서에 명백히 일본인이 조선인을 학살했다는 내용을 기술했다. 그러나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일본은 학살이라는 표현을 ‘살해’라고 수정한 데 이어 ‘희생’이라고 변경하더니 급기야 2013년 초에는 교과서에서 내용을 삭제하는 등 자신의 선조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 미화 혹은 왜곡시켜 왔다. 자신의 선조들이 당시 많은 조선인을 죽였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음에도 이를 무시하면서까지 왜곡하려는 것이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우리나라는 이 사건에 대해 그럼 어떻게 대처하고 있을까. 부끄러운 현실이지만 정작 우리는 국사 교과서에조차 거의 언급이 안 되고 있다. 또한 어떠한 정부차원의 규명작업 역시 없어 잊어져 가고만 있다. 지난 2014년 19대 국회 여야 의원 103명이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위원회’를 설치하는 특별법안을 발의했으나 통과되지 못하고 폐기됐다.

이 사진은 당시 일본에 있던 서양인들이 충격적인 현장을 보고 카메라에 담았으나 이는 공개되지 않고 개인적으로 대부분 보관돼 왔다. 이를 정성길 사진연구가가 수소문 끝에 구한 귀중한 사진들이다. 관동대지진 사건과 관련한 수백 장의 사진을 모은 정 연구가는 이 사건의 실체를 낱낱이 밝히기 위해 수년간의 작업을 통해 500여장의 사진을 책으로 묶은 ‘사진으로 본 관동대지진의 실체’를 최근 발간했다. 이 책은 온라인(옥션, G마켓, 11번가)에서만 판매되고 있다. 

1948년 유엔 총회에서는 제노사이드(genocide, 집단학살)에 관한 협약이 승인되고 인종·이념 등의 대립을 이유로 특정집단을 대량학살하는 행위를 범죄로 정의하는 국제법을 통과시켰다. 이에 중국의 난징대학살과 나치에 의한 유태인 학살이 최초로 제노사이드 범죄로 적용됐다. 관동대지진 대학살 사건은 제노사이드로 인정돼야 할 중대한 사건이 분명함에도 아직 정부 차원의 움직임이 없다.

현재 일본은 계속해서 정부 차원에서 이 같은 역사적 사건을 자국 교과서 내용에서 수정·삭제 등으로 덮어가려고 하고 있거나 학살이 아니라는 핑계를 대고 있다. 이러한 때에 일본의 관동대지진 대학살을 입증할 사진 자료가 나왔기 때문에 정부의 적극적인 규명 움직임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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