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31일 故 장준하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민주화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포천시와 ‘장준하 100년 위원회’가 상호협력에 관한 협약을 체결하는 자리에서 故장준하 선생 장남 장호권장준하100년위원회 공동위원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제공: 장준하100년위원회) ⓒ천지일보 2018.9.7
지난 7월 31일 故 장준하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민주화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포천시와 ‘장준하 100년 위원회’가 상호협력에 관한 협약을 체결하는 자리에서 故장준하 선생 장남 장호권장준하100년위원회 공동위원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제공: 장준하100년위원회) ⓒ천지일보 2018.9.7

故장준하 선생 장남 장호권 인터뷰

장준하, 일제강점기 독립군 활동

독재정권에 항거하다 옥고 치러

“독립유공자에 적절한 대우해줘야”

[천지일보 인천=김미정 기자] “장준하 선생은 첫째 부인을 ‘민(民)’이라 부른다. 그는 내 아버지가 아니라 백성과 결혼한 민의 아버지다.”

서울 국회의사당 인근 ‘장준하 100년 위원회’ 사무실에서 만난 장호권 장준하100년위원회 공동위원장은 자신의 아버지인 민족주의자 故장준하 선생을 회고하며 이같이 말했다.

장준하 선생(1918, 평안북도 의주 탄생)은 독립투사이자 민족주의자이며, 언론인, 정치(제7대 국회의원, 옥중출마 당선)계까지 다양한 일에 몰두했던 일제강점기 광복군과 임시정부 독립군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장 선생은 월남 파병전을 피하기에 급급한 시절에도 ‘악법도 법이다’라며 맏아들 장 위원장을 월남전에 보냈다. 심지어 아들의 결혼식 축의금마저도 반독재 기자들에게 줬다.

그러다 해방이 된 이후 정치인으로서 박정희 독재정권에 항거하며 옥고를 치른 뒤 1975년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타살 의혹이 제기됐지만, 정부는 실족사라고 발표했다.

당시 28세였던 장 위원장은 아버지의 시신을 직접 메고 내려왔다. 그는 “아버지 영정 앞에 3일간 무릎을 꿇고 앉아 ‘아버지께서 꿈꾸던 세상을 만들겠노라’고 작심을 했다”며 그때의 심정을 토로했다.

그는 결혼 3개월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은 아버지의 사인을 규명하던 중 정치적인 비리(턱뼈가 8조각으로 부서지는 테러 당함)로 가족을 두고 홀로 싱가포르로 떠나 20년간의 망명 아닌 망명생활을 했다.

그러다 지난 2012년 ‘장준하 공원 파주통일동산’으로 묘를 이장하던 과정 중 장 선생 두개골 오른쪽에 타살 흔적이 발견되면서 그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다시 불거졌다. 진실 규명을 위해 2013년 ‘장준하 진실규명 특별법안’도 발의됐으나 통과되지 않았다.

지난달 26일 장준하100년위원회는 서울광장서 독립운동가 고(故) 장준하 선생 탄생 100돌을 기념하며 ‘장준하100년, 건국100년’ 행사를 열었다. 이날 위원회는 선생의 뜻을 기리고 의문사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장 위원장은 “장준하 의문사 진상조사가 지금까지 이뤄지지 않는 것은 국회에서 박정희 친일 민족 반역 군사독재 세력에 빌붙어 이어온 적폐 정치집단과 마름들에 의해 제동이 걸려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장 위원장은 독립유공자에 대한 보훈사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보여주기식으로 진행되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일제 식민시대에 민족을 배신한 죄업을 감추기 위해 독립운동가들을 핍박하고 사회진출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그들에게 동조하며 편안한 삶을 구걸한 비굴하고 나약한 독립운동 참여자들이 있다”며 “정부는 이들을 보훈대상으로 우선시하며 민족진영의 진정한 독립지사들을 소외시키고 저급으로 대접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장 위원장은 “오랜 세월 독립운동가로서 자존을 지킨 대가로 받은 소외와 천대, 그래서 얻은 가난을 이제 명예와 존경, 예우를 받는 유공자로 살 수 있도록 적절한 처리가 이뤄지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장준하100년위원회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장 위원장은 “장준하 선생의 기본정신은 통일로 민족이 하나가 되는 것”이라며 “위원회의 앞으로의 100년의 최대 전제는 ‘조국 평화’”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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