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상트페테르부르크 6 – 궁전광장
[역사이야기] 상트페테르부르크 6 – 궁전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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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지난 4월 29일에 에르미타시 박물관을 관람했다. 2007년 방문 이후 두 번째이다. 관광버스는 궁전광장 앞에서 내렸다. 광장 왼편에는 에르미타시 박물관이 있고 오른편에는 구(舊) 해군 참모본부가 있다. 구  해군 참모 본부 중앙에는 개선아치가 있는데, 그 위에는 마차를 모는 승리의 여신상이 조각돼 있다.   

궁전광장 중앙에는 높이 47.5m, 직경 4m, 무게 600t이라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돌기둥이 있다. 이 기둥이 알렉산드르 원주 기둥인데 1812년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834년에 세워졌다. 

기둥 꼭대기에는 알렉산드르 1세(재위 1801~1825)의 얼굴을 한 천사가 십자가를 붙잡고 뱀을 짓누르고 서 있다. 뱀은 나폴레옹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한편 궁전광장은 러시아 역사 현장이다. 1905년 1월 ‘피의 일요일’과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장소이다. 

1905년 1월 22일, 일요일 아침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들이 길거리를 행진했다. 그들은 황제에게 노동권 보호를 청원할 생각으로 궁전으로 향했다. 행렬의 선두에는 러시아 정교회 사제 가폰(1870~1906)이 있었다. 1903년 봄에 가폰 신부는 ‘공장 노동자 클럽’을 만들었다. 모임의 주된 내용은 친교와 명사 강연이었다. 클럽은 활기를 띠어 1904년 가을에는 회원수가 9천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1904년 12월말에 1만 2천명의 노동자를 가진 금속기계회사  푸틸로프 공장에서 가폰 조합원 4명을 포함한 노동자들이 해고당했다. 노동자들은 연일 집회를 열어 해고자 복직을 요구했고, 1905년 1월에는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은 확대돼 450여 공장 11만명이 동조파업을 했다. 이러함에도 사업주들은 완강했고 노사는 교착상태에 빠졌다. 

1월 22일에 가폰 신부는 니콜라이 2세에게 직접 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나섰다. 청원서에는 해고자 복직 요구를 사업주가 거절했다는 내용과 함께 8시간 노동제, 노동권 보장 등이 포함돼 있었다. 

이 날 오후 2시에 궁전광장에는 20만명이 넘은 노동자와 가족들이 모였다. 이 대열 앞에는 ‘병사여, 인민을 쏘지 말라’는 플래카드가 들려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군대는 대열을 향해 일제 사격을 가했고 1천명 이상의 노동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게다가 황제의 기병대가 돌진해 칼을 휘둘렀다. ‘피의 일요일’ 사건을 계기로 노동자 파업은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모스크바·바르샤바 등지에서 노동자들은 연일 시위에 나섰다. 

더구나 이 시기는 러일전쟁이 한창이었다. 1904년 2월 8일 밤, 일본은 선전포고도 없이 여순(旅順)을 기습 공격했다. 일본군은 만주로 진입해 9월에는 랴오양(遼陽)을 점령했고, 1905년 1월 1일에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대장 지휘하의 제3부대가 여순을 함락했다. 이렇게 러시아가 패전하고 있는데 국내에서 노동자 파업이 일어났으니 러시아는 그야말로 내우외환이었다.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난 지 12년이 되는 1917년 10월 25일, 네바 강에서 정박 중인 순양함 오로라호에서 한 발의 공포탄이 울렸다. 이를 신호탄으로 혁명지도자 레닌은 겨울궁전을 습격해 임시정부 카렌스키를 몰아냈다. 사회주의 소비에트 정권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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