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가친척이 한자리에 모여 즐거움을 나누는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럴 때면 외로움이 더욱 커지는 이들이 있다.

모두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추석 연휴를 앞둔 14일 서울역. 하지만 역사 곳곳에는 여느 때처럼 냄새를 풍기며 거리에 누워 잠을 자거나 삼삼오오 무리지어 술을 마시는 노숙자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이들도 불과 몇 달, 길게는 10년 안팎으로 돌아갈 가족과 친척, 친구, 그리고 희망이 있었다. 추석에도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한 채 술기운으로 명절을 보낼 서울역 노숙자를 만나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운 심경을 들어봤다.


“마음은 있어도 가진 게 없어 용기내기 쉽지 않아”

▲ 지팡이와 봉지를 든 한 노숙인이 서울역을 향해 절뚝거리며 힘겹게 걸음을 떼고 있다. 우측으로는 또 다른 노숙인들이 바닥에 누워 있거나 앉아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 6년째 서울역에서 노숙자 생활을 하고 있는 유성호(41, 가명) 씨가 추석 명절을 앞두고 담배를 태우며 가족을 떠올리며 깊은 슬픔에 잠겨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추석이 어머니 기일인데…”
[천지일보=유영선] 6년째 서울역에서 노숙자 생활을 하고 있는 유성호(41, 가명) 씨는 사업 실패 후 충북 음성군에 위치한 사회복지시설인 ‘꽃동네’에 입소해 봉사하면서 잘 지내왔다고 한다.

“참 좋은 분들이 많은 곳이에요”라고 ‘꽃동네’에 대해 극찬한 유 씨는 그곳을 나와 지금의 서울역에서 노숙자 생활을 하고 있다. 그가 ‘꽃동네’에서 나온 이유는 다름 아닌 ‘알코올 의존증’ 때문이었다. ‘꽃동네’에서는 금주가 규범이었지만 유 씨는 이를 번번이 어겼다.

“몇 개월 잘 참다가 화가 나면 다시 술을 마시게 되고…. 아마 30번 정도 될 거예요. 꽃동네를 나왔다 들어갔다 한 것이요.”

그동안 알코올 의존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보기도 했지만 마음먹은 대로 치유가 잘 되지 않았다고 유 씨는 말했다.

21살에 일찍 장가를 들었다는 그는 현재 중학교 2·3학년인 아들과 딸이 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일찍이 결혼해 아이들을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계속된 사업 실패로 가정이 깨지게 됐다.

“사업이 망하면서 아내가 직장을 다닌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가부장적이어서 여자가 직장 다니는 것을 싫어했어요. 하지만 사업이 망하다 보니 아내가 일하는 것을 어쩔 수 없이 허락하게 됐어요.”

하지만 유 씨의 아내는 회사 상사와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갔고, 당시 초등학교 1학년과 유치원생인 아이들을 도맡아 키울 수밖에 없었다.

약 4년이 지난 뒤 유 씨의 아내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을 아내한테 맡긴 유 씨는 따로 집을 나와 아내에게 생활비를 보내주기로 약속한 채 직장을 다녔다.

지인의 소개로 안산에 있는 한 샷시 회사에 들어간 유 씨는 한동안 아내에게 생활비를 보냈지만 6개월이 지나 회사가 부도나자 결국 자포자기 상태에 이르렀다.

현재 유 씨는 돌아가서 함께 살 수 있는 가족이 있지만 가족과 함께 살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유 씨는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살고 있다는 것만 해도 너무 고맙고 감사하다”며 “하지만 제가 어려웠을 때 아내가 다른 남자한테 갔다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힘들어요. 전 끝까지 우리 아내랑은 못 살아요”라고 손사래를 쳤다.

그는 또 “제가 조금만 화가 나면 싸우고 험한 말이 막 나올 텐데…”라며 “그것을 되풀이하고 싶지도 않고 하고 싶지도 않아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유 씨는 다가오는 추석이 어머니 기일이라 고향에 꼭 가고 싶지만 고향이 아닌 이곳 서울역에서 명절을 보낼 것 같다며 굵은 눈물을 흘렸다.

그는 또 “잘 살아보려고 마음을 먹고 있어요. 예쁜 딸내미 아들내미한테 해주고 싶은 것이 너무 많지만 못 하고 있어요”라며 “그래서 눈물만 흘리고 있죠…. 너무 마음이 아파요”라고 자식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했다.

유 씨는 “알코올 의존증이 다 낫게 되면 ‘꽃동네’로 돌아갈 거예요. 그래서 남은 인생을 저보다 못한 사람을 위해 봉사하면서 살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 서울역 앞에서 혼자 소주를 마시는 노숙인의 뒷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벌초 못 해 드린 게 가장 마음 아파”
13년째 서울역에서 노숙자 생활을 한다는 최동석(52, 가명) 씨도 건설업을 하다 IMF로 사업이 실패해 서울역으로 오게 됐다. 그의 어머니는 최 씨가 사업에 실패해 모든 것을 다 잃게 되자 그 충격으로 쓰러져 결국 숨을 거뒀다.

그는 “그때 당시 직원들을 챙기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신세는 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직원들을 살 수 있게 하려고 집도 땅도 다 팔고 결국 거지 신세가 됐다”고 말했다.

미혼인 최 씨에게 남은 혈육이라고는 누이 두 명뿐이다. 하지만 첫째 누이는 생사여부도 알 수 없고, 서울 상계동에 사는 둘째 누이와는 사이가 좋지 않다.

최 씨는 “이번 추석에도 서울역에서 지내야 할 것 같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어 “가족도 친척도 보고 싶다. 나도 사람인데…”라며 “마음이 아프다. 막상 가진 게 없으니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고 답답함을 호소했다.

최 씨는 또 “그나마 결혼을 안 했으니 다행이다. 아내나 자식이 있으면 더욱 마음이 안 좋았을 것 같다”며 “가장 마음이 아픈 일은 부모님의 묘를 벌초 못 해드린 것”이라고 고충을 털어놨다.

단 돈 차비 몇 만 원이 없어 자식의 도리를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최 씨는 “너무나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이 원망스럽다”고 안타까움을 전했다.

지난해 최 씨는 이틀 동안 막노동해서 부모님의 묘를 찾아 벌초했지만 올해는 유난히 잦은 비 때문에 인력시장에 일거리가 없어 차비를 마련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 서울역 앞 노숙인들이 막걸리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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