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 안의 모습 ⓒ천지일보 2018.8.31
전시장 안의 모습 ⓒ천지일보 2018.8.31

서울역사박물관 ‘신촌(新村)’展

지역사와 새로 유입된 문화 조명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청년들의 문화공간으로 빠질 수 없는 ‘신촌’은 예로부터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던 땅이었다. 특히 1960~1970년대에 들어서는 청년문화를 선도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청년들이 신촌으로 모이기까지 이 지역은 지역사적 특성을 지니며 발전해 왔을까.

◆조선시대 신촌

신촌(新村)이란 지명은 ‘새로운 마을’이라는 뜻의 일반명사에 가까워 새로 생긴 마을은 모두 신촌이라고 불렀다. 이에 여러 곳의 신촌이 서울 곳곳에 존재했다. 농경지를 개척해 새로 생겨난 마을, 전쟁이나 재해를 입은 이주민이 개척한 마을 등 그 지명의 유래도 다양했다.

서대문구 신촌의 지명은 조선 초기 하륜이 이곳을 도읍으로 정하자는 ‘무악주산론(毋岳主山論)’을 펼친 이래 새롭게 발견된 땅이라는 뜻에서 ‘새터말’이라고 부른 것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결국 북악 아래 경복궁 일대가 수도로 결정되자 신촌 일대는 한양 외곽의 한적한 농촌지역으로 자리 잡게 됐다. 다소 협소하고 풍수지리상으로 주산이 빠지고 산수가 좋지 못하다는 점에서 최종 도읍지로 선정되지 못했지만, 이곳은 연희궁, 서잠실, 의열묘 등을 두는 등 조선왕조는 계속 이 지역에 관심을 뒀다. 또한 신촌지역은 도성과 한양 서부지역을 오가는 길목에 위치해 중계지 기능을 담당했다. 지리적으로 보면 신촌은 한강변의 서강과 양화진으로 가는 중간지점이 위치한다. 양화진으로 가는 길은 고려시대부터 요충지였던 강화지역으로 연결되는 주요 간선도로였다.

◆조선 후기 신촌, 인구 증가

신촌지역에 많은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후기부터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전국적으로 농촌사회가 피폐해지면서 고향을 버린 유민들은 삼문(서대문, 서소문, 남대문) 밖 반송방과 반석방(현재 의주로 서쪽부터 아현동 일대) 등지에 모여 들었다. 한양의 도성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환경조성이 탁월한 미개척지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촌지역에 정착인구가 점차 늘어나면서 농지가 확대돼 갔고 다양한 취락들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전시장 안의 모습 ⓒ천지일보 2018.8.31
전시장 안의 모습 ⓒ천지일보 2018.8.31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 신촌

일제강점기는 신촌이 현재의 모습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의 경성도시계획사업은 한적한 농촌마을이던 신촌에 커다란 변화를 줬으며 현재의 가로망과 토지구획 형태의 기반이 됐다. 구체적으로 경의선 개통과 신촌역 영업의 시작, 연희전문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의 이전, 토지구획정리사업과 일단의 주택지 경영사업을 포함한 도시계획사업을 통해 신촌은 큰 변화를 맞았다.

6.25전쟁 이후 1950~1960년대의 서울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신촌에도 피난민과 지방민의 유입이 증가해 많은 수의 불량주택이 생겨났다. 1970~1980년대 신촌은 교통망 확충, 핵심 도시계획 추진, 신촌로와 성산대로 개통 등 지속적으로 ‘중심부’화가 된다.

◆청년문화의 중심지

신촌은 많은 문인에게 영감을 준 땅이기도 했다. 베스트셀러 소설 중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 김승옥의 ‘무진기행’,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등의 많은 작품이 신촌에서 창작됐다. 그런가 하면 1980년대 정권비판적 작품으로 종종 탄압의 대상이 됐던 연극단이 대거 신촌에 자리 잡기도 했다. 기존의 주류 대중음악과 차별화된 이른바 ‘언더그라운드 음악’이 연주되는 라이브 음악 공간도 등장했다.

한국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 이화여자대학교 앞은 신세대 여성의 유행을 선도하는 최첨단 소비문화지역으로 탄생했다. 이처럼 신촌은 청년들에 의해 새로운 지역으로 거듭났고, 최근에는 문화에 관심 있는 청년문화기획자들이 다시 신촌으로 모여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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