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현해 놓은 미륵사 ⓒ천지일보 2018.8.28
재현해 놓은 미륵사 ⓒ천지일보 2018.8.28

1993년 미륵산 사자암 조사

삼국유사 기록 신빙성 높였으나

2009년 석탑 해체, 복원 과정서
 

창건 설화와 다른 유물 발견돼

대왕릉서 무왕 추정 인골 발견

과학적 분석, 역사적 가능성 ↑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사귀어 두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가다.”

‘서동요’는 고려시대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의 무왕조에 실린 향가다. 백제의 서동(薯童:백제무왕의 어릴 때 이름)이 신라 제26대 진평왕 때 지었다는서동요는 젊은 남녀 간의 로맨스가 담겨 있다. 내용을 보면, 서동은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를 흠모했고 밤마다 공주가 몰래 나와 자신을 만난다는 내용의 서동요를 지어 신라 도읍인 경주의 아이들에게 퍼뜨리도록 했다.

대궐 안까지 노래가 퍼지자 왕은 선화공주를 귀양 보내게 됐고, 서동은 선화공주를 백제로 데려올 수 있었다. 서동이 임금이 된 후 선화공주는 왕비가 됐다고 한다.

금제사리봉안기가 출토된 미륵사지 석탑 ⓒ천지일보 2018.8.28
금제사리봉안기가 출토된 미륵사지 석탑 ⓒ천지일보 2018.8.28

◆미륵사지와 선화공주의 수수께끼

이 같은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백제의 땅이었던 전라북도 익산 곳곳에 남아 있다. 먼저 백제 무왕하면 빠질 수 없는 곳이 ‘미륵사지’다. ‘삼국유사’ 무왕 조에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師子寺)를 가던 중 용화산 밑의 큰 연못에서 미륵 삼존이 출현하자 사찰을 짓고 싶다는 부인의 청을 받아들여 연못을 메운 후 법당과 탑, 회랑 등을 각각 세우고 ‘미륵사’라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즉, 설화 속에 왕비가 된 선화공주가 백제 무왕에게 청해 익산에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내용이 담긴 것이다.

백제 시대에 미륵사는 세 개의 탑과 세 개의 금당이 동서로 나란히 서 있는 독특한 모습이었다. 미륵사는 통일신라시대에 거대한 불교 사원으로 번창했고 고려시대에도 중요한 불교 사원으로 존재했다. 조선의 불교 억압 정책에도 명맥을 유지하던 미륵사는 임진왜란 이후인 17세기부터 역사에서 사라졌다.

재현해 놓은 심주석 최초 노출 모습 ⓒ천지일보 2018.8.28
재현해 놓은 심주석 최초 노출 모습 ⓒ천지일보 2018.8.28

그러다 1980년대 이후 미륵사지에 대한 본격적으로 발굴조사가 시작됐다. 2만여점의 유물이 출토됐고 1993년 미륵산 사자암 발굴조사에서 백제, 통일신라 기와와 토기, 명암막새 등이 출토됐다. 이는 삼국유사 기록의 신빙성을 높여줬다.

하지만 지난 2009년 뜻밖의 문제가 발생했다. 석탑을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서탑 사리공에서 ‘금제사리봉안기’가 발견됐는데, 이 유물은 무왕과 선화공주의 로맨스가 어린 미륵사지의 창건 설화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사찰을 발현한 장본인의 이름이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 귀족인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로 등장한 것이었다.

미륵사지 석탑을 해제, 복원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 미륵사를 세운 이유는 왕후의 요청에 의한 것인데,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미륵사는 백제 귀족인 사택적덕의 딸로 인해 세워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천지일보 2018.8.28
미륵사지 석탑을 해제, 복원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 미륵사를 세운 이유는 왕후의 요청에 의한 것인데,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미륵사는 백제 귀족인 사택적덕의 딸로 인해 세워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천지일보 2018.8.28

◆익산 쌍릉 대왕릉서 인골 발견

잠잠하던 서동요 설화에 또다시 관심이 높아진 것은 최근 백제 고분군인 쌍릉 ‘대왕릉’에서 인골이 발견되면서다. 익산 쌍릉은 조선 전기 편찬된 고려사(1449~1451)에 처음 소개됐다. 대왕릉과 소왕릉은 백제 무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왕릉은 부여 능산리고분군에 있는 가장 큰 백제왕릉인 ‘동하총’보다 크다.

쌍릉에 대한 조사는 1910년 처음 실시됐다. 조선총독부는 우리 민족문화의 정통성을 말살하고 식민지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고적조사 사업을 추진했다. 이때 쌍릉은 ‘갑을병정’의 순서 중 두 번째 등급인 을(乙)에 분류됐다.

1917년 12월 야쓰이 세이이치 등이 불과 며칠간 쌍릉 조사를 실시했다. 당시 복명서에는 ‘마한시대의 왕릉으로 여겨졌으나 대왕릉과 소왕릉 모두 백제 말기의 능묘이다. 분구, 석실, 목관 등의 수준을 고려하면 백제 왕릉 또는 그에 상당한 자의 능묘가 분명하다’고 짤막하게 기록해 놓았다. 1920년 고적조사 보고서에는 13줄의 내용, 2장의 사진, 2장의 도면만 공식 기록으로 남겨졌다.

그리고 2017년 일제에 의해 파헤쳐진 지 100년만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등이 쌍릉(대왕릉)의 발굴조사를 착수했다. 발굴조사 중 석실 내부 관대의 끝부분에 놓여있던 나무상자가 발견됐다. 100년전 유물을 반출하면서 흩어진 인골의 파편을 한데 모아 놓아둔 목제 유골함이다. 이 유골함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익산 쌍릉 대왕릉 발굴 조사 전 모습 (출처: 문화재청) ⓒ천지일보 2018.8.28
익산 쌍릉 대왕릉 발굴 조사 전 모습 (출처: 문화재청) ⓒ천지일보 2018.8.28

◆과학적 분석, 무왕 가능성 높여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이 인골자료가 무덤의 주인과 연결된다면, 백제 무왕의 능인지를 결정짓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고 연구를 기획했다. 인골 분석결과 50대 이후의 60~70대 남성 노년층으로도 추정 가능한 신체적 특징과 퇴행성질환의 흔적이 확인됐다.

삼국사기에는 ‘풍채가 훌륭하고 뜻이 호방하며 기상이 걸출하다’고 소개돼 있으며, ‘미륵사지 서탑 금제사리봉안기’에서는 대왕폐하로 불린 것을 알 수 있다.

익산 쌍릉(대왕릉) 석실 내부와 발견된 목제유골함 (출처: 문화재청) ⓒ천지일보 2018.8.28
익산 쌍릉(대왕릉) 석실 내부와 발견된 목제유골함 (출처: 문화재청) ⓒ천지일보 2018.8.28

이 같은 사실은 익산을 기반으로 성장해 왕권을 확립한 백제 무왕의 무덤이라는 역사적 가능성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하고 있어 의미가 크다.

이성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은 “대왕릉은 7세기 전반대의 무덤 중 가장 크고 공력이 많이 드는 형태”라며 “신분 체제 등이 법으로 정해진 백제에서 이 규모의 무덤의 주인은 당시 무왕 밖에 없다. 게다가 발견된 인골을 조사하면서 역사적으로 개연성이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백제 쌍릉 대왕릉에서 발견된 인골과 3D복제뼈. 이 인골은 백제 무왕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천지일보 2018.8.28
백제 쌍릉 대왕릉에서 발견된 인골과 3D복제뼈. 이 인골은 백제 무왕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천지일보 2018.8.28

일각에서는 일본이 과거 발굴과정에서 뼈를 안치해 놓고 가서 이번 연구가 이뤄졌다는 말도 나왔는데, 이에 대해 이 실장은 “물론 뼈가 남아있어서 후속 연구를 할 수 있으나 이는 일본인 덕분이라고 생각해야 하는가, 아니다”라며 “애초 도굴이 이뤄진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현재의 기술로는 발견된 뼈에 대한 자세한 연구 진행이 어렵다며, 콜라겐이 잘 남아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뼈 부위를 잘 보관하고 있다가 향후 DNA를 연구할 수 있는 더 좋은 기술이 도입되면 분석해 봤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고고학 문헌사적 연구도 더욱 진행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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