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칼럼]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사암 정약용 생애 고찰(3)
[박관우 칼럼]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사암 정약용 생애 고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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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정약용(丁若鏞)의 형제를 소개하면 장남으로서 의령남씨(宜寧南氏) 소생으로 이복형(異腹兄)이 되는 부연(鬴淵) 정약현(丁若鉉)이 있는데 동생들이 천주교와 관련해 화(禍)를 당하였으나 천주교를 믿지 않고 끝까지 가문을 지켰다는 점에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동복형(同腹兄)이 되는 차남 선암(選庵) 정약종(丁若鍾)은 본래 주자학(朱子學)과 도가사상(道歌思想)에 심취했으나 중형(仲兄) 손암(巽菴) 정약전(丁若銓)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운 이후 입교(入敎)하여 아우구스띠노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하였으며,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명도회(明道會)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선암은 또한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신학자로서 ‘주교요지(主敎要旨)’ 제하의 저서를 남겼는데 이는 당시 최초의 평신도 예비자 교리서라 할 수 있었으니 선암의 신학적 지식이 어느 정도로 탁월하였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와 같이 교회의 지도자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선암은 1801년(순조 1) 발생한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형제 중에서 유일하게 서소문밖 네거리 사형장에서 향년(享年) 42세를 일기(一期)로 장렬한 순교(殉敎)를 했다. 

삼남 손암(巽菴) 정약전(丁若銓)은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수제자인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했으며, 동복동생 정약용과 우애가 두터웠다는 점인데, 신유박해 때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해배(解配)되지 못하고 1816년(순조 16) 향년(享年) 59세를 일기(一期)로 세상을 떠났으며 ‘송정사의(松政私議)’와 ‘자산어보(滋山魚譜)’를 저술했다. 

특히 자산어보는 당시 흑산도 근해에 있는 수산물을 어류(魚類), 패류(貝類), 조류(藻類),해금(海禽), 충수류(蟲獸類) 등으로 분류해 조사한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서 실학자로서의 손암의 진면목(眞面目)을 유감없이 보여준 탁월한 저서라 할 수 있다.

또한 사암의 누이는 1784년(정조 8) 베이징(北京) 북당천주교회에서 예수회 그라몽 신부로부터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함으로써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영세자가 된 만천(蔓川) 이승훈(李承薰)의 부인이었으니 사암과 만천이 처남과 매부관계였다는 점도 예사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이러한 형제들 이외에 정재원(丁載遠)의 부실(副室) 잠성김씨(岑城金氏) 소생의 정약횡(丁若鐄)과 세명의 누이가 있었으니 이를 정리하면 사암은 5남 4녀중에 4남이 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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