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궁중여인(宮中女人)
[고전 속 정치이야기] 궁중여인(宮中女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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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청초에는 황제와 관련된 야사가 많다. 순치제가 사랑하던 동소완(董小宛)의 죽음으로 상심해서 출가했다는 고사도 있다. 허무맹랑한 한족 문인이 지어낸 것에 불과하지만, 비슷한 사건은 있었다. 순치는 동악비를 사랑해 황후를 제치고 그녀를 책립하려고 생각했다. 결국 몽고 코르친부 출신인 효장황후 보르지지터 보무보타이와 충돌했다. 순치는 황후의 책립과 폐출을 마음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정국은 태종 홍타이지의 부인 보무보타이가 장악했다. 그녀는 명의 대장 홍승주의 투항을 받아 산해관 입관의 결정적 요인을 마련했다. 대청왕조 대업성위를 위한 중요한 갈림길에서 내부의 혼란을 극복하려고 홍타이지 사후 최고 실력자로 부상한 도르곤에게 개가하는 것도 꺼리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6세인 순치제 푸린을 제위에 올렸다.

그녀는 아들을 엄격하게 길렀다. 푸린도 기본적으로는 모친에게 순종했다. 그러나 사랑은 절대로 양보하지 않았다. 14세에 처음 결혼한 황후는 어머니와 동족인 보르지지터씨였다. 현명한 여자였지만, 몽고와의 세력연합을 위한 정치적 색채가 농후한 정략결혼이었다. 2년 후 푸린이 갑자기 전대에 황후를 폐한 사례를 보고하라고 명했다. 일순간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몽고 출신은 감히 나서지 못했다. 한족 출신 대신이 만류하다가 명예를 탐낸다고 혼이 났다. 결국 보르지지터씨는 측실로 물러났다. 

공식적 이유는 정숙하지 못하고 조종의 사당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유별난 질투 때문이었다. 넘치는 성욕을 자제할 필요가 없는 황제가 이러한 황후를 용서할 필요는 없었다. 2년 후 다시 쫓겨난 황후의 조카이자 모친의 질손녀를 황후로 맞아들였지만 푸린은 관심이 없었다. 푸린은 제수인 이복동생 보무보과르의 아내를 사랑했다. 모친은 아들의 불륜을 좌시할 수 없었다. 보무보과르가 모친에게 하소연하자, 순치제는 위신도 버리고 다짜고짜 동생을 불러서 귀싸대기를 올려붙였다. 양소왕이 분을 참지 못해 화병으로 죽자, 순치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미망인이 된 동악비를 궁으로 불러들였다.

동악비에 대한 순치제의 은총은 청의 유명한 스캔들이었다. 동씨가 입궁하자마자 곧바로 귀비로 책립해 모친에게 선전포고했다. 청초에는 만주귀족이 정권을 장악했지만, 홍타이지 이후 몽고여자들이 후궁을 장악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푸린은 몽고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한족을 중용했다. 태후에게는 그것도 위협이었다. 동악비는 나름대로 현명하게 처신했지만, 개인의 노력으로 모자지간의 권력다툼을 막을 수는 없었다. 동악비가 아들을 낳자 태후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그녀는 자신의 거처를 북경교외로 옮기고 중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동악비를 불렀다. 출산한 지 두 발 밖에 되지 않은 동악비는 간병하다가 건강이 악화됐다. 게다가 그녀가 낳은 아들이 생후 104일 만에 이유도 없이 죽었다. 황자를 죽게 했다는 이유로 동악비에 대한 비난여론이 높아졌다. 결국 동악비는 잔혹한 궁정투쟁을 견디지 못하고 우울증이 심화돼 21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태후는 목적을 달성했지만 가련한 동악비는 천명을 다하지 못했다. 중국을 떠돌다가 깊은 산골에서 뜻밖에 청의 황족 아이신기오르씨를 만났다. 그녀도 세상이 바뀌지 않았더라면 공주였을 것이다. 차라리 산속에서 자그마한 카페를 연 그녀가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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