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답성놀이의 시작점으로 성곽 길을 따라 3바퀴를 돌면 극락승천한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 고창읍성의 북문이다. ⓒ천지일보(뉴스천지)

극락승천 염원 담긴 ‘고창 답성놀이’ 조상의 지혜 엿보여

◆ ‘石’ 빼면 섭섭한 고창읍성의 전설

[천지일보=이현정 기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원형보존이 잘 이뤄진 곳으로 유명한 고창읍성. 장대봉 좌청룡과 우백호의 지세를 최대로 이용해 축조된 성곽 길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도 선정될 만큼 수려함을 선보인다.

이러한 고창읍성도 음력 윤달이면 부녀자들의 거침없는 발길질을 감수해야 하는데 이는 읍성에 관한 전설 때문이다.

음력 윤달 초엿새와 열엿새, 스무엿새 되는 날은 바야흐로 저승문이 열리는 날로 고창의 부녀자들이 저마다 손바닥만한 돌을 머리에 이고 읍성 성곽 길을 돈다. 이는 지금의 ‘고창 답성(踏城)놀이’로 풍속이 이어지고 있다.

답성놀이는 성곽 길을 한 바퀴 돌면 아픈 다리가 낫고, 두 바퀴 돌면 무탈하게 장수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승천한다는 이유 때문에 예전부터 고창마을에서 행해지는 민속놀이다.

특히 윤달 3월에는 그 효력이 가장 좋기 때문에 부녀자들은 야무지게 성곽 길을 세 바퀴 도는데 그 모습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무색해질 정도다.

◆ 세월이 흘러 세월을 자랑하는 고창읍성

고창읍성은 낙안읍성‧해미읍성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읍성으로 꼽히며, 그 중 가장 원형에 가깝게 읍성기능이 보존돼 있다.

둘레 1684m, 높이 4~6m, 면적 16만 5858㎡로 동‧서‧북문 3개소와 치(稚) 6개소, 옹성(甕城) 3개소와 성 밖의 해자(垓字) 등 전략적 요충시설을 두루 갖춘 고창읍성. 이 성은 1453년인 조선 단종 원년에 외침을 막기 위해 전라도민들이 축성한 자연석 성곽으로 나주진관의 입암산성과 함께 호남내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 만들어졌다.

고창읍성의 성벽은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틀에 알맞게 쌓아 올려 인공미가 아닌 자연‧전통미가 그대로 숨 쉬고 있다는 것이 큰 특징이자 자랑이다.

또 이 자연스럽고 튼튼한 읍성을 원형에 가깝게 보존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가 바로 ‘답성놀이’다.

윤 삼월에 답성의 효험이 크다는 것을 강조한 이유는 겨우내 부풀었던 성벽을 밟아 굳건하게 하기 위함이다. 또 답성 시 머리에 돌을 얹는 이유도 몸에 체중을 가중시켜 성을 다지기 위한 뜻을 담고 있다.

부녀자들의 답성이 끝난 후 머리에 이던 돌은 성벽 근처에 꼭 두고 가야 했는데, 이는 유사시 무기로 쓰기 위함이다.
고창읍성의 답성놀이는 성벽의 견고함과 굳건함을 위해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시키지 않고 자율적으로 참여시키려 했던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한 때 고창읍성은 방화로 성내 22개동의 건물이 소진되는 아픔도 있었지만 지금은 성곽 일부와 14개동의 거물이 복원돼 예전과 다름없는 늠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묵묵히 흐르는 세월을 담아내 역사적 가치와 문화적 가치를 동시에 인정받은 고창읍성은 보존성 또한 최고로 인정받아 현재는 성곽 연구자료와 영화‧드라마 촬영지로도 각광받고 있다.

영화 <왕의 남자>와 드라마 <서동요> <한성별곡> <황진이> <추노> 등 수많은 작품들이 고창읍성을 담아갔다.

잘 보존된 문화재를 작품에 담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무엇보다 곡선의 아름다움을 잘 살려낸 성곽의 외형은 그야말로 감탄사가 나온다.

 

 

▲ 고창읍성 내에 있는 맹종죽, 영화 <왕의 남자> 촬영지로 유명하다. ⓒ천지일보(뉴스천지)

◆ 시대와 호흡하는 문화재 고창읍성

고창읍성은 지난 시절 모양성(牟陽城)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이는 백제시대 대 고창 지역이 모량부리라고 불렸기 때문이다.

축성 당시 조선시대 고창현의 읍성으로서 호남내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 역할과 행정업무를 담당했다. 읍성 내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이 정무를 보던 동헌과 관원들의 숙소 등 관아건물 22개동이 마련됐다. 행정업무와 함께 사옥도 마련돼 죄인들을 가둬 놓는 일까지 맡았고 1871년에는 흥선 대원군 쇄국정책의 상징물인 척화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시대의 정치적 상황을 고스란히 담아낸 고창읍성이 지금은 문화재로 남아 힘 빠진 호랑이 격으로 보일 수 있지만, 마을주민들과 함께 나눈 정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지금도 매년 답성놀이를 통해 성곽 길을 걸으며 복과 건강을 기원하는 지역민, 지금은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고창여고가 읍성 안에 있어 매일같이 북문을 교문 삼아 학교를 다녔던 학생들, 아침이면 국민체조 음악이 흘러 자연스럽게 읍성 내에서 체조와 산책을 하는 사람들.

한 자리에 서서 우리나라의 지난 역사를 전달하기 보다는 지역민과 함께 호흡하며 현재까지 그 정을 나누는 문화재는 흔치 않다.

바라보며 감상하는 문화재는 순간이지만, 시대와 함께 호흡하는 문화재는 삶의 일부가 돼 주민들이 그 존재감을 각인하고 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