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窓] 신흥무관학교와 육군사관학교의 역사 연계성
[동북아 窓] 신흥무관학교와 육군사관학교의 역사 연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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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형 (사)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 소장

 

육군무관학교는 대한제국의 육군 장교양성기관으로 1896년 1월에 설치됐으나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일시 문을 닫았다가, 대한제국 수립 이듬해인 1898년에 신식 군대의 장교 양성을 목적으로 다시 설치됐다. 이후 학교는 1907년 대한제국 군대해산 후에도 남아 있다가 1909년 폐교됐다. 1905년에 입학한 김좌진 장군을 포함해 졸업생 수는 282명이었다.

신흥무관학교는 만주 서간도에서 1910년 6월 10일 ‘신흥강습소’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가, 1912년 통화현으로 이전한 뒤 1913년 건물을 신축해 신흥중학교로 개칭했으나 각지에서 지원자가 몰려오자 신흥무관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이회영·시영 6형제의 헌신적 자금지원으로 설립된 신흥무관학교는 상해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의 공식적 장교 양성기관이었으나, 35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일제의 가중된 탄압으로 1920년 가을 폐교됐다. 졸업생들은 일본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여 이겼던 봉오동 전투(1920년)와 청산리 전투(1921년)의 주역들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극에 달했지만 임정은 1940년 9월 광복군을 창설했다. 광복군은 대일선전포고와 함께 연합군의 일원으로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고 있던 중, 미국의 원자탄 투하로 갑자기 일본이 패망함으로써 국내 진입 기회가 사라졌다. 해방 후 미 군정은 임정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광복군은 1946년 5월 16일 무장해제한 채 개별 귀국했다. 결국 1946년 미 군정은 일본군 대좌 출신 이응준, 만주군 중좌 출신 원용덕을 주축으로 국방경비대를 설치했고, 군 중견장교 양성기관인 군사영어학교를 열었다. 이 학교 수료자 110명 가운데, 대다수가 일본 및 만주군 출신이었고 광복군 출신은 한 사람도 없었다. 

비록 임정 요원과 독립군, 광복군 출신들이 창군과정에서 소외되기는 했지만 그들은 일제에 항거해 3.1운동을 비롯한 크고 작은 무장독립투쟁운동을 끊임없이 전개해 왔던 것이다. 국방부 홈페이지에 따르면 1909년 안중근 의사 이토 히로부미 사살, 1919년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창설 등으로 기록돼 있다. 한편 육군사관학교(육사) 홈페이지에 육사는 1946년 5월 국방경비대사관학교로 개교한 이래, 그해 6월 조선경비대사관학교로, 1948년 9월 육사로 명칭이 확정됐다고만 적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육군무관학교는 일제강점기에는 신흥무관학교로, 해방과 독립으로 육사로 그 명맥이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때 늦은 감은 있으나 이제 우리는 일제강점기 군 역사를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비록 러일전쟁 이후 득세한 친일파 장교들이 대한제국 군대의 중화기를 일본군 진영으로 빼돌려 군대가 저항도 제대로 못하고 일본군에 해산 당해 국권이 상실되기는 했어도, 그 시기에 목숨 바쳐 조국을 지켰던 수많은 독립투사, 선열들의 빛나는 역사를 후손인 우리들이 바로 새겨 지켜야 하겠다. 헌법 전문에도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라고 명시돼 있다. 

국방부나 육사의 홈페이지 기록이 우리 군 역사의 영속성 면에서 미흡하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국방부와 육사의 광복이전 역사 기술에 일제강점기 군의 활동상이 기록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를 위해서 국방부는 육사와 군 원로들(광복군 출신 포함)의 의견을 취합해 우리 군의 역사가 일제강점기로 인해 단절되지 않도록 육군무관학교로부터 신흥무관학교, 그리고 육군사관학교로 면면히 이어져 온 역사의 연계성을 재정립할 때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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