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에 사용한 투구와 환도 ⓒ천지일보 2018.8.19
조선후기에 사용한 투구와 환도 ⓒ천지일보 2018.8.19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오늘날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 자리 잡고 있는 옛 동대문운동장 지역은 조선 후기 군사시설이 있던 곳이다. 한양도성 동쪽 지역은 다른 곳에 비해 고도가 낮고 출입이 용이해 방어가 취약한 단점이 있었다. 이를 보완하고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다수의 군사시설을 배치하게 됐다. 조선후기에 가장 중요한 군사시설은 훈련원과 하도감이었다.

◆조선의 군인양성소

고려 후기부터 군사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과 훈련 등에 필요성이 제기됐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태조 1) 훈련관을 설치했다. 이는 군사의 진법 훈련과 교육을 담당하던 관청인 ‘중군군후소’를 흡수해 조선에서 군사의 교육과 훈련을 주관하는 기구로 자리 잡았다. 1446년(세조 12) 훈련관이 훈련원으로 개칭됐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따르면, 훈련원의 역할은 군사에 대한 시재와 무예 연마 및 무경(武經, 병법에 관한 책)을 습독하는 일을 관장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조선은 군사 선발과 능력 시험을 위해 여러 선발 제도를 운영했다.

무과를 비롯해 지방의 한량이나 군관, 중앙관원을 대상으로 도시(都試, 무사 선발을 위한 특별시험)와 관무재(觀武才, 왕의 명령이 있을 때 시행한 무과) 등을 시행했다. 이는 무신들의 무예 연마와 권장을 위한 것으로, 도시는 봄과 가을 두 차례 실시했다.

우수한 성적을 보인자는 특전을 주거나 관직에 임명하기도 했다. 국왕이 참석해 진법과 전투 훈련을 검열하는 대열을 비롯해 군대 단위로 화포 훈련을 시키거나 훈련원에서 주관해 진법이나 활쏘기 등을 시행하기도 했다.

수선전도 (제공: 서울역사박물관 한양도성연구소)ⓒ천지일보 2018.8.19
수선전도 (제공: 서울역사박물관 한양도성연구소)ⓒ천지일보 2018.8.19

◆임진왜란 후 훈련도감 창설

조선 전기 군사제도는 오위(五衛, 중앙 군제)와 진관(鎭管, 지방군사제도) 체제로 운영됐다. 16세기 이후 군사 확보가 어려워지는 등 군사제도가 부실화됐다. 특히 임진왜란을 맞이해서는 군사의 동원이 불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새로운 군사제도가 필요하게 됐고 동시에 수도 방어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오위를 개편한 ‘오군문(五軍門)’이 만들어졌다.

특히 오군문 중 가장 핵심적인 군영은 훈련도감이었다. 1593년(선조26) 류성룡의 주도하에 훈련도감을 설치한 것을 시작으로 인조반정 이후 국왕 호위와 경기 지역 방어를 강화하기 위한 총융청, 수어청, 어영청 등이 만들어졌다. 1682년(숙종 8) 국왕 호위 강화를 위해 금위영이 설치되면서 조선 후기 오군문이 완성됐다.

훈련도감은 화포와 총기를 사용하는 포수, 활을 사용하는 사수, 칼과 창을 사용하는 살수의 삼수병(三手兵)으로 구성됐다. 훈련도감의 분영으로는 ‘하도감’이 있었다. 하도감에는 조총고, 궁전고, 화약고 등 창고를 뒀다. 또 하도감에는 불랑기 등 같은 화기 제작이 이뤄졌고 제작 후에는 연습장으로 사용됐다.

1881년 신식 군대인 교련병대(별기군)가 창설됐다. 이후 하도감은 삼청동으로 이전됐다가 이듬해 폐지됐다. 훈련원은 개항 이후에도 군사훈련 및 시재 주관 등의 역할을 수행했으나, 1907년 군대 해산으로 폐지됐다. 하도감과 훈련원이 있던 자리에는 근대식 공원인 훈련원공원이 개설됐으며, 1925년 공원의 일부에 동대문운동장의 전신인 경성운동장이 건설됐다.

한편 서울역사박물관 분관 한양도성연구소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훈련원과 하도감’ 전시를 내년 2월 10일까지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내 동대문역사관 기획전시실에서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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