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청백리] ⑧박팽년 선생
[조선의 청백리] ⑧박팽년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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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淸白吏)를 아는가. 청렴결백한 공직자를 의미하며, 오늘날 청백리상을 수여할 정도로 유명하다. 청백리 제도는 고려시대부터 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200여명의 청백리가 배출됐다. 도덕·효·인 등의 덕목을 겸비, 이상적인 관직자인 조선의 청백리를 알아보자.

박팽년 선생묘 (제공: 문학박사 조성린씨) ⓒ천지일보 2018.8.19
박팽년 선생묘 (제공: 문학박사 조성린씨) ⓒ천지일보 2018.8.19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사육신으로 유명한 박팽년(朴彭年) 선생은 조선의 청백리 중 한 사람이다. 할아버지는 목사 박안생(朴安生)이고 아버지는 판서 박중림(朴仲林)이다. 본관은 순천이다. 세종 갑인에 문과에 오르고, 정묘에 중시에 뽑혔다. 그는 성삼문, 신숙주 등 당대의 유망한 젊은이들과 함께 집현전의 학사로서 여러 편찬사업에 종사하며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48년 강서원 좌익선이 되고 1450년 집현전 직제학이 됐다가 상소한 것이 문제가 돼 파직됐으나 바로 직제학으로 복직됐고 이듬해 집의(執義)가 됐다. 1452년 집현전 부제학이 됐으며 단종1년(1453) 좌부승지, 우승지, 좌승지를 거쳐 이듬해에는 형조참판이 됐다.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울분을 참지 못해 경회루 연못에 뛰어들어 자살하려 했으나 성삼문이 함께 후일을 도모하자고 만류해 단념했다.

세조1년(1455) 충청도관찰사로 근무하면서 청렴하고 근신한다는 평을 들었고 다시 예문관 제학으로 옮겼다가 형조참판이 돼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김등과 은밀히 단종 복위운동을 추진했다.

1456년 6월 1일 세조가 상왕인 단종을 모시고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들을 위한 연회를 열기로 하자 운검으로 내정된 성삼문의 아버지 등을 이용해 거사하기로 정했다가 장소가 비좁아 운검을 두지 않기로 했다. 이처럼 거사가 여의치 않자 다시 날을 정하기로 했다.

일이 이상하게 되자 함께 모의하였던 김질이 변심해 그의 장인인 정창손에게 밀고했고 정창손은 바로 세조에게 보고했다.

이에 성삼문 등 다른 사람들과 함께 체포돼 혹독한 국문(鞠問)을 받았다. 세조가 그의 재주를 사랑해 자신에게 모의사실을 말하면 살려주겠다고 은밀히 회유했으나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오히려 비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세조를 가리켜 상감이라 부르지 않고 나으리라고 불렀다. 이에 세조가 노하여 “그대가 나에게 이미 신(臣)이라고 칭하였는데 지금 와서 비록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고 묻자 그는 “나는 상왕(단종)의 신하이지 나으리의 신하는 아니므로 충청감사로 있을 때 한 번도 신(臣)자를 쓴 일이 없다”고 대답했다.

정리=장수경 기자
도움말=문학박사 조성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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