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 멀리 청기와를 얹은 선정전이 보인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종로3가역 6번 출구로 나와 10여 분을 걷다 보면 저 멀리 고적(古跡)한 창덕궁 돌담이 보인다. 역대 조선시대 및 대한제국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창덕궁.

그래서 이곳저곳을 보는 것만으로 역사를 읽을 수 있다. 다른 궁보다 비교적 훼손이 적어 한적한 정취를 만끽할 수 있으며, 특히 북쪽으로 펼쳐진 후원은 자연을 벗 삼고자 했던 선조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창덕궁은 후원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뤄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절찬을 받고 있다.

 

▲ 창덕궁을 들어가려면 정문인 돈화문을 지나야 한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창덕궁에서 관람객이 가장 먼저 들어서는 곳은 정문, 돈화문이다. 돈화문은 궁궐의 서쪽으로 치우쳐 있는데 이는 창건 당시(1405년), 앞에 종묘가 자리 잡고 있어 진입로를 종묘 서쪽으로 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정문을 들어서서 계속 걷다 보면 오른쪽으로 금천교가 놓였다. 여기서부터 사진기 셔터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일본인과 중국인뿐 아니라 벽안의 방문객들을 찬찬히 곳곳을 둘러본다.

금천교는 창덕궁이 창건되고 6년 후 1411년 봄 진선문 밖 어구에 만들어졌는데 숱한 화재와 전란에도 원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현존하는 5대궁의 금천교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

궁의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은 ‘어진 정치를 펼쳐라’라는 의미를 지녔으며, 현판은 검정 바탕에 노란 글씨로 양각됐다. 액자의 모퉁이에는 구름모양이 장식됐다. 인정전 천장은 경복궁의 근정전에 있는 쌍용과 달리 두 마리의 학이 노닐고 있다. 또한 1908년에 설치된 전등이 노란 천에 뒤덮여 관람객을 맞이한다.

청기와를 얹은 선정전은 궐내 현존하는 건물 가운데 유일하다. 궁궐을 검소하게 짓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 조선시대에 청기와 건물은 꽤 사치스러웠다. 하지만 광해군은 인정전과 선정전에 청기와를 올리라고 지시했으며, 이를 곁에서 지켜본 사관은 사치스런 궐을 조성한다며 비판을 가했다. 이러한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서 볼 수 있다. 편전인 이곳은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로 지형에 맞춰 인정전 동쪽에 세워졌다.

일제강점기의 창덕궁은 왕궁으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했으며 특히 순종이 승하한 후 훼손 강도가 심해졌다. 하지만 1991년부터 복원사업이 진행되면서 1997년 12월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한국을 대표하는 궐이 됐다.

 

▲ 영친왕의 비 이방자 여사가 지내던 낙선재 ⓒ천지일보(뉴스천지)

금천교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낙선재가 사대부 안채마냥 한적하게 위치했다. 후원을 향해 걷다보면 낮은 언덕 아래 낙선재가 있다. 현재 낙선재는 창덕궁 소속이었으나 원래 창경궁 일원이었다. 낙선재는 국상 중에 소복한 왕후가 머물던 곳이라 단청을 입히지 않았다.

낙선재와 석복헌은 1989년까지 사용됐다. 낙선재에는 순종황제의 이복동생 영친왕의 비 이방자 여사가, 석복헌에서 동쪽으로 있는 수강재에는 덕혜옹주가 생활했다. 석복헌은 순종의 왕비인 순정효황후가 기거했다.

창덕궁은 자연이 묻어나는 곳이다. 돈화문 주변에는 300~400년의 시간을 함께한 회화나무 여덟 그루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자유롭게 뻗어나는 나무 가지는 종종 학자의 기개에 비유된 것으로 알려졌다. 회화나무를 심은 것은 이곳에 조정의 관료가 근무하는 관청이 들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후원에는 뽕나무와 다래나무 등 다양한 종의 나무가 수백 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창덕궁은 창경궁과 연결돼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창경궁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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