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버트 박사 서거 69주기
석탑 찾은 뒷이야기 공개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1907년 3월 19일 헐버트 박사는 한 외국인과 함께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송도(개성)로 갔다. 도보로 남쪽으로 30여리 떨어진 풍덕으로 향했다. 걷는 도중 여기저기에서 수레바퀴 자국이 남아있었다. 사람만이 간신히 다닐 수 있는 계곡을 따라 500여 미터를 올라가니 석탑이 있던 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석탑이 일본에게 약탈당했다는 소식은 사실이었다. 석탑이 있던 자리에 파괴된 석탑의 기반석만 남아있었다. 석탑 파편이 여기저기에 나뒹굴었다. 석탑 파편을 볼 때 전문가가 아닌 초보자들이 석탑을 성급하게 해체했음이 분명했다.
◆기고문과 사진 통해 진실 알려
10일 (사)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가 헐버트 박사 서거 69주기를 맞아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이 석탑은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1층 중앙 ‘역사의 길’ 안쪽에 서 있는 10층 석탑이다. 높이는 13m다. 국보 제86호인 석탑은 기단과 탑신에 조각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석탑 1층 몸돌에 고려 충목왕 4년인 1348년에 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원래 이 석탑은 북한 땅인 개성 부근 풍덕군(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개풍군 광덕면) 부소산(扶蘇山)에 위치한 경천사라는 절에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일본 궁내부대신 다나까 미스야키가 1907년 1월 황태자 순종의 결혼식 축하 사절로 한국에 와 무단으로 이 석탑을 해체했다. 석탑은 수레에 실어 개성역으로, 개성에서 철로로 부산으로, 부산에서 배로 일본으로 옮겨 다나까의 집 뒤뜰에 세웠다. 즉 소중한 우리 문화재가 약탈된 것이다.
일본 정부는 석탑 약탈은 무책임한 한국인들의 짓이라며 소문을 부정해왔다. 하지만 헐버트가 일본 고베에서 발행하던 ‘재팬크로니클’지에 한국에서의 일본의 만행(Vandalism in Korea)이라는 기고문을 싣게 되자 일본은 할 말이 없어졌다. 이 기고문에는 헐버트가 석탑 약탈 현장을 직접 확인하고 모든 정황을 파악한 내용과 사진이 담긴 것이었다. 그러자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도 무척 곤혹스러워했다. 하지만 여전히 다나까는 석탑을 돌려주지 않았다.
◆ 만국평화회의 열리는 헤이그서도 폭로
헐버트는 모든 진상이 드러났음에도 일본이 석탑을 반환하지 않자 국제 여론에 호소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에서도 이 사실을 폭로했다. 만국평화회의를 보도하던 ‘만국평화회의보’가 헐버트의 주장을 보도하자 ‘뉴욕포스트’ 등 국제적인 신문들이 이를 받아 대서특필했다. 영국인 베델도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7일자를 통해 처음으로 석탑 약탈을 보도하는 등 헐버트와 공조하며 언론 보도를 통해 일본에게 석탑 반환을 촉구했다. 석탑 탈취 사건이 국제적으로 보도돼 비난 여론이 세계 곳곳에서 들끓었다.
이에 당황한 일본 외교관들은 이런 일로 일본이 국제적 망신을 당해서는 안 된다며 본국에 석탑을 돌려줄 것을 건의했다. 서울의 통감부도 석탑 반환을 일본 정부에 요청했다. 우여곡절 끝에 일본은 1918년 석탑을 돌려줬다.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장은 “벙어리 냉가슴을 앓듯 한국인이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 두 외국인인 헐버트와 베델의 필사적인 투쟁으로 이 사건이 국제문제로 비화해 결국 석탑이 한국으로 돌아왔다”며 “하지만 돌아온 석탑은 조선총독부 창고에 방치됐다”고 말했다.
이후 이 석탑은 광복 후 1960년 경복궁에 복원됐다 1995년 해체 후 다시 정밀하게 복원해 2005년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개관과 함께 지금의 자리에 세워진 것이다.
김 회장은 “헐버트가 현장에 가서 사진으로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면 경천사 10층 석탑은 아마도 우리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라며 “통일이 이뤄지면 헐버트가 희망한대로 석탑이 원래 있던 자리인 경천사에 원형대로 복원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