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이지솔 기자] 박정은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대학교 교수가 9일 오후 서울 관악구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실에서 ‘1920년대 한국 불교에서의 비구계 수계와 승려 결혼’을 주제로 8월 특별발표를 진행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8.8.10
[천지일보=이지솔 기자] 박정은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대학교 교수가 9일 오후 서울 관악구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실에서 ‘1920년대 한국 불교에서의 비구계 수계와 승려 결혼’을 주제로 8월 특별발표를 진행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8.8.10

박정은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대 교수
1920년대 한국 불교 ‘승려 결혼’ 조명

[천지일보=이지솔 기자] “일제강점기 한국 불교에 있어서 가장 큰 특징은 대처승의 증가다. 동시에 주목할 사실은 비구계 수지자 또한 증가했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대척점에 서 있는 대처승과 비구계 수지자가 증가했다는 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박정은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대학교 교수가 9일 오후 서울 관악구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실에서 ‘1920년대 한국 불교에서의 비구계 수계와 승려 결혼’을 주제로 8월 특별발표를 진행했다.

박 교수는 1920년대 통도사와 마곡사 주지 선거 사건에서 드러난 대처승 문제를 분석함으로써 일제강점기 한국 승려들이 사찰 규범을 어떻게 대응했는지 발표했다.

박 교수 설명에 따르면 통도사 주지 선거 사건은 김구하 스님이 통도사 주지 선거에 당선될 당시 총독부 와타나베 아키라가 김구하 스님이 대처승이라는 사실을 문제 삼은 일이다.

이와 관련 박 교수가 거론한 본말 사찰에 관한 법규인 본말사법에 따르면 일제는 조선을 강제로 점유한 후 1911년 불교계에 대한 통제와 관리를 위해 사찰령을 제정했다.

사찰령은 사찰과 관련한 일체의 권리와 내용을 조선총독과 각 도장관의 인․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조항이 핵심을 이뤘다. 특히 총독의 인가사항으로 사찰의 병합․이전․폐지 및 그 기지나 명칭의 변경을 규정했고(제1조), 본사 사법 제정(제3조), 사찰의 사유재산 및 귀중품의 처분(제5조), 그리고 30본산 주지의 취직(시행령 제2조) 등을 규정했다.

이를 본바 총독부는 주로 사찰 재산문제에 관심을 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총독부는 대처승이면 본사주지와 말사주지 등을 하지 못하게 하는 등 비구승을 장려했다. 대처승은 결혼해 아내와 가정을 둔 사람을 가르킨다. 반면 비구승은 출가해 결혼하지 않은 승려를 말한다.

그런데도 왜 대처승은 늘어났을까. 대처승이 아닌 비구가 사망할 경우 재산은 상좌가 없으면 사찰 자산으로 귀속된다. 그러나 조선후기 승려의 사유재산 등이 법적으로 인정되면서 재산을 물려주기 위해 결혼을 한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이미 조선후기부터 법적으로 승려의 사유재산 혹은 재산상속 등이 인정되면서 가족이 될 수 있는 기본적인 바탕이 이뤄졌다”고 했다. 이후 총독부는 1915년 민적법 개정으로 민적을 대한민국의 호적법과 유사한 가족관계 등록제도로 변경했다.

당시 총독부는 제사상속을 중심으로 하는 부계 친족 집단을 조선 가족제도의 핵심으로 간주해 그전까지 존재했던 비종법적 가족 관계를 배제하고 종법에 따라 호적을 재구성했다. 이로 인해 식민지 시대호적과 민적법 개정 등이 대처승을 증가하게 하는 기폭제가 됐다는 것이 박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1923년~1945년 승려 호적과 조선총독부 문서를 통해 1909년부터 조선에 처음으로 민적법이 실행되면서 한국 승려들이 최초로 법명뿐만 아니라 속명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민적법은 조선시대에 인구수를 조사·파악하고 신분을 공시하는 제도로 조선말기인 1909년 3월 호적에 관한 법률 제8호로 공포돼 실시됐다.

승려들의 사유재산은 어떻게 형성됐을까. 박 교수는 “속가에서 친부모에게 상속받을 수도 있고, 신도들의 보시금이나 시주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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