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사)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김필순과 동지들. 뒷줄 왼쪽부터 이갑, 길필순, 노백린, 유동열, 이동휘/ 중간 줄 왼쪽부터 김마리아, 김미렴(김마리아 둘째 언니), 노숙경(노백린 큰 딸), 김마리아 작은 어머니, 김세라, 유각경, 장문경(문익환 목사 장모), 유각경 ⓒ천지일보 2018.8.9
김필순과 동지들. 뒷줄 왼쪽부터 이갑, 길필순, 노백린, 유동열, 이동휘/ 중간 줄 왼쪽부터 김마리아, 김미렴(김마리아 둘째 언니), 노숙경(노백린 큰 딸), 김마리아 작은 어머니, 김세라, 유각경, 장문경(문익환 목사 장모), 유각경 ⓒ천지일보 2018.8.9

김필순 형제, 집안의 노비들 해방
배재학당 졸업 후 통역•교수 활동
안창호에 신민회 비밀본부 내줘

 

간도 통화현으로 건너가 병원 개업
헤이룽장성으로 옮겨 독립군 도와
일본 첩자에 의한 독살로 생 마감

외국 선교사들이 황해도 장연의 소래마을에 오면 신약성경을 번역했던 서상륜, 서경조 형제의 집이나 김판서 댁이라 불리는 김윤오(金允五, 容淳)의 집 사랑채에 묵었다. 김윤오 집안은 서울에서 큰 부자로 살다 고조부 대에 낙향하여 소 60마리를 도지로 주었고, 소래마을 불타산 앞 부채꼴 모양의 버려진 들판을 사들여 10여 년간 옥토로 바꾸어 대지주가 되었다. 소래마을 사람들은 김씨 집안 토지를 소작하면서 광산김씨 집안사람처럼 되었다. 그런 집안의 둘째 아들인 김윤오는 1903년경 서울로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 장연군의 수령을 보좌하는 향장(鄕長)을 지내 좌수댁이라 불렸다.

선교사 매켄지는 전도를 갈 때 김윤오와 함께 갔다. 김윤오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신자가 되고자 했다. 김윤오의 명성은 장연읍을 넘어 신천, 해주, 은율 등 황해도 일대에 알려지고, 김구, 최광옥, 안창호, 이갑, 이동휘, 노백린 같은 지사들과 깊은 교분을 나누게 되었다.

1878년 태어난 김필순은 김윤오의 12살 아래 배다른 동생이었다. 김필순이 열서너 살 무렵 집안에 우환이 덮쳤다. 김윤오의 친동생이자 집안의 기대주였던 김윤열(金允烈)이 1891년 과거에 급제하고 돌아오는 길에 장티푸스에 걸려 갑자기 사망했다. 2년 후인 1893년 아버지 김응기(金應淇, 聖瞻)가 전처소생의 두 아들과 후처소생 김필순을 비롯하여 아들 둘, 딸 넷을 두고 사망했다. 친어머니 안성은(安聖恩)은 34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다.

그런 우환 속에서 이듬해인 1894년 캐나다 선교사 매켄지가 왔고, 김필순이 개종했으며 집안 장남이며, 김마리아의 아버지 김윤방(金允邦, 彦淳)이 사망했다. 이리하여 집안은 큰집 김윤오와 작은집 김필순 형제가 이끌 수밖에 없게 되었다.

소래마을에 교회가 들어오면서 ‘양반’ ‘상놈’ 하던 차별을 없애고 서로 한 형제처럼 대했다. 김필순 형제는 집안의 노비들을 해방시켰다. 남녀차별도 없애 여자 아이들도 신식학교에 다니고 서울이나 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김필순은 13살 때인 1891년 11월 두 살 위의 정경순(鄭敬淳)과 결혼했다. 김필순은 키가 훤칠하고 건장하였으며, 성품이 바르고 두뇌가 명석하였다. 1894년 16살 때, 세례를 받은 그에게 언더우드 선교사가 말했다.

“서울에 가서 공부를 하지 않겠는가? 내가 모든 뒤를 돌봐주겠네.”

“안 된다!”

어머니 안씨는 반대했다. 공부한답시고 서울 가서는 기생집에 출입하며 놀아나는 양가 자제들 이야기를 들어왔던 까닭이었다.

언더우드 목사는 “책임지고 공부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김필순은 서씨 집안의 두 아들 서병호, 서광호와 함께 서울로 가서 언더우드 목사 집에서 숙식을 하며 배재학당에 다니게 되었다.

제중원의학교에서 8년간의 의학교육을 마친 7명의 학생들의 제1회 졸업생(1908년) ⓒ천지일보 2018.8.9
제중원의학교에서 8년간의 의학교육을 마친 7명의 학생들의 제1회 졸업생(1908년) ⓒ천지일보 2018.8.9

1898년 배재학당을 졸업한 김필순은 제중원 책임자 새록스(A. M. Sharrocks) 박사의 통역 겸 조수로, 이듬해부터는 의료선교사 애비슨(Oliver R. Avison)의 통역 겸 조수로서 공부하면서 수업시간에 통역을 했으며, 병동과 시약소 조수로서 병원경영을 배웠고, 애비슨을 도와 ‘유기화학’ ‘화학교과서’ ‘외과총론’ 등을 우리말로 번역하였다. 제중원에 환자가 몰려들어 입원환자들 식사가 문제되자 애비슨은 조수 김필순에게 해결을 맡겼다. 김필순은 구내식당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어머니와 아내에게 소래의 가산을 정리하여 서울로 오라고 하였다. 아내 정경순, 어머니 안씨와 남동생 인순(仁淳), 여동생 순애(淳愛, 후에 김규식 박사와 결혼), 필례(弼禮)가 1901년 서울 제중원으로 이사해 왔다. 동생 인순을 남학교인 경신학교에, 여동생 순애와 필례는 연동여학교(후에 정신여학교)에 입학시켰다.

1903년 형 김윤오도 소래의 가산을 정리하여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왔다. 김윤오는 김필순과 동업으로 남대문 밖 제중원 옆에 김형제 상회를 개업하여 홍콩, 하와이 등지 인삼무역과 큰 목재상도 했다. 대지 220평에 2층 양옥 28평, 일본집 9평, 반양옥 14칸, 창고가 12칸의 건물이 있고, 앞에는 정류장이 있었다.

미국 클리블랜드의 스텐다드 석유재벌 루이스 세브란스(Louis Henry Severance)가 병원을 지을 돈을 기부했다. 남대문 밖 지금의 서울역 맞은 편 복숭아골(도동) 언덕배기에 건축공사가 시작되었다. 캐나다 출신의 건축가 고든 박과 중국인 청부업자 해리장이 공사를 맡았는데 러일전쟁이 터지자 자재 값이 폭등하여 건축업자가 공사를 포기했다. 애비슨과 고든 박은 김필순의 도움을 받으며 공사를 진행했다. 김필순은 수업시간 외에는 공사현장에 살다시피 했다. 이렇게 하여 1904년 9월 준공되었고, 1909년 7월 사립 세브란스 의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김필순이 배재학당에 다닐 때 평양출신 안창호는 구세학당(민노아학당 또는 밀러학당)에 다니고 있었다. 둘은 배재 협성회 회원으로 만나 의기투합하여 의형제를 맺었다. 둘은 동갑이었으나 서로 자신을 아우라 하고 상대를 형이라 높이며 공대했다. 김필순은 1902년 미국 유학을 떠나는 안창호가 이혜련과 결혼하여 함께 떠나도록 제중원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릴 수 있게 모든 준비를 도와주었다. 1907년 초 미국에서 돌아온 안창호가 신민회 운동을 벌일 때 김필순은 가장 중요한 조력자가 되었으며, 동지들은 주로 세브란스 병원 김필순의 사택에서 회합과 토론을 했다. 김윤오, 김필순 형제는 찾아오는 사람이 많은 안창호를 위해 김형제 상회의 2층 방 하나를 안창호를 위해 내 주었다. 이 방은 안창호 일생의 충실한 동지들인 안태국과 차리석이 상주하면서 보좌하는 가운데 신민회 비밀본부가 되었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의 군대가 일본에 의해 강제 해산될 때 시위대 장병들이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였다. 남대문 일대가 피바다가 되었다. 안창호와 김필순은 사력을 다해 부상병들을 구조했다. 김필순은 세브란스 병원에 밀려드는 부상병 간호에 어머니와 필례, 함라, 미염, 마리아 등 여동생과 조카들을 동원했다.

제중원 의학교는 김필순이 애비슨 밑에서 도제식 수련을 받기 시작한 1898년 전후쯤부터 정식 학교 체제를 갖추었고, 1908년 6월 3일 김필순을 비롯한 7명의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게 되었다. 김필순은 개업하지 않고 학교에 남아 후진을 양성하기로 했다. 김필순은 정식 교수로 임명되고 애비슨은 장차를 위해 병원경영에 대해서도 많은 책임을 맡겨 훈련했다.

김필순이 이상촌 건설 사업을 추진하면서 치치하얼시에서 운영했던 병원 자리 ⓒ천지일보 2018.8.9
김필순이 이상촌 건설 사업을 추진하면서 치치하얼시에서 운영했던 병원 자리 ⓒ천지일보 2018.8.9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한 일제는 ‘총독암살’ 음모사건을 날조하여 서북지방의 신민회 회원 600여명을 잡아들였다. 이른바 105인 사건이다. 1912년 1월 신민회의 핵심이었던 김필순에게 체포의 손길이 다가오자 김필순은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고 야간열차로 압록강을 건너 단동으로 망명했다.

처음 김필순은 청나라 타도를 위한 혁명군의 위생부대에 종사할 생각이었다. 단동에 도착해 보니 위안 스카이(遠世凱)가 권력을 잡았고, 혁명의 전망이 어두웠다. 이에 조선인들이 거주하는 간도의 통화현으로 가서 병원을 열었다. 김필순의 병원 개업은 인접한 유하현에 독립운동 기지를 꾸린 이회영, 이동녕 등 신민회 동지들에게 의료와 함께 경제적으로도 큰 힘이 되었다. 그해 여름 어머니와 가족들이 옮겨와 합류했다.

통화까지 일본의 영향력이 뻗쳐 오자 1916년 김필순은 내몽골 가까운 헤이룽장(黑龍江)성 치치하얼로 병원을 옮겼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소래마을에서 했던 것과 같이, 130여리 되는 일대 허허벌판을 매입하고 농토가 없어 소작살이를 하고 있던 만주 동포 30가구, 약 300명을 모아 이상촌 건설을 시작했다. 김형제 상회의 동업자 형 김윤오 가족도 합류했다. 사람들은 살집을 짓고 농토를 개간했다. 어머니 안씨도 손수 흙벽돌을 찍는 고된 일을 했다.

밤을 타서 독립군들이 오면 그들을 따뜻한 방에서 재우기 위해 아이들은 부엌에서 밤을 지샜다. 여성들은 영하 40도 되는 밤에 강의 얼음을 깨 물을 길어와 독립군들 옷을 빨아서 밤새 밟아 화로에 말려 숯불 다림질해서 아침에 입고 나갈 수 있게 했다. 병원에서 버는 돈은 독립군 자금으로 다 들어가 가족들은 먹는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며 살았다.

1919년 1월 18일 파리에서 제1차 세계대전 전후처리를 위한 강화회의가 열리자 김규식을 대표를 파견하기 위해 상해, 천진 등지의 청년지사들이 신한청년당을 조직했다. 신한청년당의 당수는 김필순과 함께 서울 유학을 왔고, 바로 아래 여동생 구례(具禮)와 결혼한 소래마을 출신 서병호(徐炳浩, 서경조의 아들)였다. 신한청년당은 한국인의 독립청원에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하도록 할 독립운동을 일으키도록 밀사들을 국내와 일본, 만주 등지로 파견했다. 이것이 3.1운동을 촉발시켰다. 김필순은 상해로 와서 여동생 순애(淳愛)와 김규식을 결혼시키고 파리로 떠나는 여비와 필요한 주선을 하여 그를 배웅했다.

그해 가을 김필순의 병원에 일본인 하나가 조수를 하겠다며 찾아왔다. 조수가 필요했던 김필순은 그를 채용했다. 어느 날 아침부터 점심도 먹지 못하고 큰 수술을 두 건이나 하고 지쳐서 소파에 기대고 앉아 있을 때 간호부가 우유 한 컵을 권했다.

“간다씨(조수)가 선생님 수술하시느라고 식사도 못하셨다고 쉬실 때 이걸 드리라고 했어요.” 우유를 단숨에 마신 김필순은 몸에 이상을 느꼈다. 일본인 조수는 암염으로 만든 알약을 뜨겁게 해서 먹게 한 후 뜨거운 물수건으로 습포를 하게 하였다. 얼마 후 김필순의 배는 시커멓게 변했고 곧 숨을 거두었다. 조수는 사라지고 없었다. 소래마을의 아들 김필순은 그렇게 독립의 꿈을 다 펼치지 못하고 일본 특무(첩자)에 의해 독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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