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현배 시인, 역사 칼럼니스트

(사진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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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탑은 영국의 수도인 런던 동쪽에 있는 왕실 성채다. 템스 강의 북측 강변에 자리 잡고 있다. 1066년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온 ‘정복 왕’ 윌리엄 1세가 크리스마스에 대관식을 마친 뒤, 거칠고 사나운 런던 시민들을 위협하려고 곧바로 요새를 세웠다고 한다. ‘화이트 타워’라고 불리는 중앙 본체는 로마 시대 때 지은 성벽 바로 안쪽에, 프랑스 노르망디 케인에서 운반해 온 석회석으로 완성했다. 12, 13세기에 성벽 밖으로 요새를 넓혀 1만 5천여 평에 이르는 오늘날의 런던탑 구역이 정해졌다.

런던탑은 11세기부터 17세기까지 500여 년 동안 영국 왕을 배신한 사람들을 처벌하던 곳으로 악명을 떨쳤다. 템스 강 쪽에는 ‘반역자의 문’이라는 수문이 있었다. 죄수들은 이 수문을 통해 런던탑으로 호송되어 왔다. 많은 죄수들이 이곳의 잔디밭인 타워 그린이나 성 바깥의 타워 힐에서 처형되었다.

런던탑에 갇혔다가 처형당한 유명한 죄수로는 헨리 8세의 왕비 앤 불린·캐서린 하워드, 헨리 8세의 재상 토머스 모어, 로체스터의 주교 존 피셔, 엘리자베스 1세의 총신 에식스 백작 등이 있다. 런던탑이 세워진 이래 모두 1천 7백여 명의 죄수들이 수감되었는데, 리처드 3세의 조카인 에드워드 5세와 리처드 왕자는 12세, 10세의 어린 나이에 갇혔다가 갑작스레 사라졌다. <유토피아>를 쓴 토머스 모어는 리처드 3세의 명령으로 제임스 타이웰이란 기사가 두 아이를 살해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두 아이의 시신은 런던탑 계단 밑에 비밀리에 묻혔는데, 200년 뒤인 1674년 인부들이 런던탑 계단을 허무는 공사를 하다가 그 유골을 발견했다고 한다.

오늘날 런던탑에는 까마귀 일곱 마리가 살고 있다. 이 까마귀들은 날아가지 못하도록 날개를 잘랐다. 그렇게 해서 죽을 때까지 까마귀들을 런던탑에 머물게 하는 것은, 찰스 2세 때 다음과 같은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런던탑에 사는 까마귀가 사라지면 런던탑이 무너지고 영국이 망한다.

이 소문을 들은 찰스 2세는 까마귀를 영국을 지켜 주는 성스러운 새로 여겨 런던탑에 살게 했다. 3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까마귀는 ‘행운의 상징’이라 불리며 이곳에 둥지를 틀고 있는 것이다. 런던탑에는 까마귀들을 돌보는 사육사가 있어, 날마다 까마귀들에게 생고기 170그램과 피 묻은 비스킷을 먹인다. 때로는 달걀과 빵, 토끼고기 등을 주어 영양 보충을 시키기도 한다.

(사진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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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초, 런던탑에 갇힌 주인 곁 지킨 고양이

영국의 헨리 리즐리 백작은 예술가를 후원한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는 극작가인 셰익스피어의 예술 활동을 도와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엘리자베스 1세를 쫓아내려는 에식스 백작의 반란에 참여했다가 붙잡힌 것이다. 에식스 백작은 처형을 당했고, 헨리 리즐리 백작은 런던탑 독방에 갇혔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가 집에서 기르던 고양이 트릭시가 런던탑에 숨어들어왔다. 고양이는 용케도 독방에 갇힌 주인을 찾아왔다. 트릭시는 그날 밤부터 주인 곁을 떠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1세가 죽고 제임스 1세가 왕위에 올라 런던탑에서 풀려날 때까지 2년 동안 헨리 리즐리 백작과 같이 지냈다. 헨리 리즐리 백작은 감옥에서 풀려난 기념으로 화가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했다. 이 초상화에서도 트릭시는 변함없는 모습으로 주인 곁을 지켰다.

모기 죽였다고 귀양 간 농부

일본 도쿠가와 막부의 5대 쇼군(將軍)은 도쿠가와 쓰나요시(德川綱吉)다.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자신의 뒤를 이을 아들을 꼭 낳고 싶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아들을 얻지 못했다.

하루는 용하다는 스님을 만나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스님은 아들을 낳을 방법이 있다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쇼군께서 아들을 얻지 못하는 것은 전생에 살생의 악업을 쌓았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낳으려면 동물을 정성껏 돌보고 보호해야 합니다.”

“흠, 그렇군. 그럼 모든 동물을 보호해야 하오? 특별히 잘 돌봐야 할 동물이 따로 있소?”

“살생의 업보를 털어버리려면 모든 동물을 보호해야 합니다. 참! 쇼군께서는 개띠라고 하셨지요? 그럼 개를 특별히 잘 돌봐 줘야겠지요.”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스님의 조언을 받아들여 1685년 동물 보호법을 만들어 선포했다. 이 법은 개·소·닭·말·돼지 등의 가축뿐만 아니라 야생 동물, 물고기, 심지어 곤충에 이르기까지 모든 동물을 죽이거나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만약에 이를 어기면 사형이나 유배형에 처한다고 했다.

백성들은 기겁을 했다. 일본 사람들은 특히 생선회를 즐기는데, 생선 요리를 먹지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달걀도 먹으면 안 되고 고기도 입에 대서는 안 된다니, 초식 동물처럼 푸성귀나 풀만 먹고 살게 된 것이다.

동물 보호법이 시행되자 많은 사람들이 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았다. 약으로 쓰려고 제비를 잡아 죽인 사람이 사형을 당하는가 하면, 피를 빨아먹는 모기를 죽인 농부가 귀양을 떠났다. 그리고 가축을 잡아먹은 죄로 할복형을 선고받은 사람들도 수없이 많았다.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특히 개에 대한 보호를 강화하여 개 호적 대장을 만들게 했다. 집에서 기르는 개는 모두 호적 대장에 이름을 올리게 하고, 개의 출생 신고와 사망 신고도 반드시 하도록 했다. 각 가정에서는 개가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으면 공포에 질려 개를 찾아 다녔다. 집에서 기르는 개를 잃어버려도 처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를 찾지 못한 집에서는 생김새가 비슷한 다른 집 개를 훔쳐 오는 경우도 있었다.

백성들은 이제 개를 집에서 기르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그러니 마을마다 떠돌이 개들이 넘쳐났다. 굶주린 개들이 음식을 훔쳐 먹는 등 피해가 날로 늘었다. 이렇게 되자 막부에서는 땅 16만 평을 마련해 울타리를 치고 10만 마리의 개를 직접 길렀다. 여기에 드는 비용만 해도 9만 냥이나 되어 막부 일 년 예산 80만 냥 가운데 11퍼센트나 차지했다.

동물 보호법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동물 보호 정책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그리고 1709년 “동물 보호법을 백 년 뒤에까지 이어 나가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동물 보호법은 그가 죽은 지 열흘 뒤에 폐지되고 말았다.

(사진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8.8.1
(사진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8.8.1

까마귀를 섬으로 귀양 보낸 사연

일본 도쿠가와 막부의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동물 보호법을 만들어 시행할 때의 일이다. 하루는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외출하여 길을 가는데,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왔다. 까마귀는 그의 머리 위를 지나다가 갑자기 뿌지직 똥을 쌌다.

“아이쿠, 이게 뭐야?”

머리에 똥벼락을 맞은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성난 표정으로 까마귀를 노려보았다.

“저런 못된 녀석이 있나? 여봐라, 저 까마귀 놈을 당장 잡아들여라!”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명령으로 까마귀가 붙잡혀 왔다. 그는 분이 풀리지 않아 까마귀를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만든 동물 보호법 때문에 까마귀를 죽을 수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이 까마귀를 지금의 시즈오카 현 동남부인 이즈의 섬 니이지마로 귀양을 보냈다.

형 집행을 맡은 관리는 까마귀를 새장에 넣어 니이지마까지 호송했다. 그리고 섬에 도착하자마자 까마귀를 새장에서 풀어 주었다. 하지만 까마귀는 그 섬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자기가 살던 에도 땅을 향해 전 속력으로 쉬지 않고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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