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민족운동]유림의 위정척사운동
[종교와 민족운동]유림의 위정척사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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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현 문학박사
▲ 성주현 문학박사ⓒ천지일보(뉴스천지)
위정척사의 흐름은 대원군의 쇄국정치, 강화도조약 체결을 전후하여 보다 분명하게 드러났다. 위정척사는 세 단계를 거치면서 민족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제1단계는 서구 열강의 세력들이 조선에 직접 물리적 힘을 가했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시기였다. 이 시기는 대원군이 섭정을 하던 시기로 기정진과 이항로를 중심으로 척사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양학양물(洋學洋物) 배척론을 주장하였다.

 기정진은 서양의 통상요구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침략으로 쇄국양이책을 고수하며 양물의 유입을 금하고, 국방을 강화하고 내수를 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항로는 주전(主戰)을 주장하면서 서양과 통상을 주장하는 자들을 이적으로 지칭하였다. 또한 서양 물건 거부와 통교의 거부만이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고 국가를 태평하게 하는 것이라고 상소하였다. 이들의 척사사상은 서양금수론과 양물금단론이었다.

제2단계는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로 인한 개항반대운동이었다. 일제의 강요로 체결된 강화도조약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지만 불평등 조약이었다. 유림들은 강화도조약 체결에 앞서 정부의 개화정책을 비판하고 일제의 경제적 침탈을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특히 최익현은 도끼를 갖고 대궐 앞에 나아가 서양화된 일본과의 조약을 거부하도록 호소하였으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도끼로 자신의 목을 잘라 달라고 상소하였다. 상소의 내용은 왜양일체론을 주장하고 일본과 교역을 하게 되면 머지않아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하였다. 최익현은 이 상소로 흑산도로 유배되었고, 결국 강화도조약은 체결되었다.

 2단계의 위정척사운동은 민족적인 현실에 주목하였으며, 제국주의 국가의 경제적 침략을 직시하고 이에 저항하고자 하였다.

제3단계는 1880년대의 개화반대운동이었다. 수신사 김홍집이 가지고 들어온 『조선책략』에 의하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기 위해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이라는 개화정책을 제시하였다. 이에 유림들은 『조선책략』의 소각을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조사시찰단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영남지방의 유림들은 척사통문을 돌리는 한편 대규모의 집회를 열고 이만손을 대표로 만인소(萬人疏)를 작성 복합상소를 하였다. 이와 같은 상소에 대해 고종은 주동자를 귀양보내는 한편 상고에 참가한 유생들을 쫒아냈다.

위정척사운동은 성리학의 의리와 명분으로 척화주전론을 주장하였고, 이를 토대로 개항과 개화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위정척사운동은 서양세력의 침략에 대한 민족적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근대화를 수행하고자 하는 데 있어서 한계를 드러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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