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기록된다. 남겨진 유물은 그 당시 상황을 말해 주며 후대에 전해진다. 역사는 미래를 바라볼 때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같은 역사적 기록과 유물을 보관하고 대중에게 알리는 장소가 박물관이다. 이와 관련, `이달에 만나본 박물관' 연재 기사를 통해 박물관이 담고 있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

[천지일보=김미정 기자] 강진 고려청자박물관 외관 ⓒ천지일보 2018.7.30
[천지일보=김미정 기자] 강진 고려청자박물관 외관 ⓒ천지일보 2018.7.30

강진 고려청자박물관

중국 이어 두 번째로 청자 완성

12세기 상감기법로 우수성 더해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도자기의 푸른빛을 고려인은 비색(翡色)이라고 한다. 근래에는 만드는 기술이 정교해져 빛깔이 더욱 좋아졌다. 술병의 모양은 참외와 같은데, 위에는 작은 뚜껑이 있고 술병의 겉면에는 연꽃이나 엎드린 오리의 문양이 있다.’

송나라 사신인 서긍은 송과 고려의 자기를 비교했다. 그리고 서적인 ‘고려도경’에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에 대해 기록했다. 고려청자는 중국에서도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할 정도로 우수했다. 고려청자가 고려시대 문화의 꽃으로 자리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고려청자를 재현하고 있는 모습 (제공: 고려청자박물관) ⓒ천지일보 2018.7.30
고려청자를 재현하고 있는 모습 (제공: 고려청자박물관) ⓒ천지일보 2018.7.30

◆다양한 문양으로 만물 담아내

전라남도 강진군에 위치한 고려청자박물관. 고려청자를 구웠던 가마가 있던 곳에 있어서인지 주변의 산세는 과거 고려시대 청자를 굽던 모습을 절로 떠올리게 했다. 박물관 상설전시실에는 고려청자의 발생과 발전, 쇠퇴 과정을 모두 담아 놓아 누구든 쉽게 고려청자를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박물관에 따르면, 고려는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청자를 생산한 나라였다.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시대로 이어지는 9~10세기 경 중국 절강성 월주요의 청자 제작기술을 도입해 우리나라에서도 청자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중국보다 조금 늦게 시작됐으나 고려는 완숙한 기량과 고유의 미감을 토대로 천하제일의 청자를 완성했다. 기능은 물론 아름다움도 일품이었다. 연꽃, 국화, 구름, 학, 연못가의 풍경 등 생활 속 친근한 소재와 장면을 청자에 담아냈다. 그 위에 맑고 푸른빛의 유약을 입힌 고려청자는 마치 자연만물을 담아낸 듯한 자태를 뽐냈다.

강진 고려청자 축제 모습 (제공:강진군) ⓒ천지일보 2018.7.30
강진 고려청자 축제 모습 (제공:강진군) ⓒ천지일보 2018.7.30

청자는 문양을 장식하는 기법에 따라 종류를 구분한다. 크게는 조각적 장식의 ‘순청자(純靑瓷)’와 회화적 장식의 ‘화청자(畵靑瓷)’, 그리고 이 두 가지 장점을 응용한 ‘상감청자(象嵌靑瓷)’가 있다. 특히 상감청자는 12세기에 본격적으로 생산됐다. 문양을 음각한 후 다른 색의 흙을 감입하는 방식인 상감청자는 고려시대 장인들의 뛰어난 창의력과 섬세함을 기반으로 했다. 

조은정 고려청자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청자의 두께는 매우 얇았는데 안과 밖을 파서 문양을 새겨 넣었다”라며 “연꽃·국화 등 장식적인 의미도 있고 왕실의 의미를 담는 문양도 있었다”고 말했다. 고려는 불교 국가이지만 도교를 믿는 사람도 많았다. 이에 도교에서 신선을 상징하는 구름·학 등의 문양을 청자에 많이 새겨 넣었다. 상감기법은 고려 말을 거쳐 조선 초 분청자와 백자에 보이는 상감기법으로까지 그 명맥이 유지됐다.

하지만 14세기에는 원의 내정간섭과 왜구의 침입, 수취체제의 붕괴, 집권층의 사치 등으로 고려청자 제작 여건이 점차 취약해졌다. 14세기 전반까지는 전 시대의 제작 경향이 지속됐지만 후반부터는 원료의 품질 저하, 조각 기술의 퇴조, 일률적으로 반복되는 문양 표현이 가속화됐다.

고려청자를 운반하던 해안운반선을 재현한 모습 ⓒ천지일보 2018.7.30
고려청자를 운반하던 해안운반선을 재현한 모습 ⓒ천지일보 2018.7.30

◆강진, 고려청자 생산 고장

전라남도 강진은 청자를 제작하는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 장소였다. 지난 2007년 5월 충남 태안 대섬 인근 해지에서 청자운반선이 발굴됐는데 이 발굴조사를 통해 ‘탐진’이라는 강진의 옛 지명이 적힌 목간이 발견됐다. 이는 강진 청자가마터가 고려 왕실인 개경(개성)에 청자를 납품했던 관요(官窯)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확증시켜준 것이다.

강진에서 고려청자가 생산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조 학예연구사는 “가장 큰 이유는 ‘원료’ 덕분”이라며 “점토를 반죽하면 무게가 상당한데 이를 다른 곳으로 운반하는 것은 매우 힘들었기에 강진이 청자 제작에 좋은 조건을 갖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두 번째 이유는 강진이 바닷가 근처에 있어 물류 운송을 하기에 좋았다는 것이다. 부산이나 대전 등 인근 지역에서 고려청자를 만들긴 했지만 품질이 떨어지거나 조각 기술이 떨어져 잠깐 운영되다 없어졌다고 한다. 이 같은 이유로 강진은 개성의 왕실과 전국의 귀족, 사찰 등의 청자 수요를 전달하는 고려청자 생산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상감기법으로 만든 고려청자 (제공: 고려청자박물관) ⓒ천지일보 2018.7.30
상감기법으로 만든 고려청자 (제공: 고려청자박물관) ⓒ천지일보 2018.7.30

 하지만 고려시대가 끝나면서 고려청자의 역사도 단절되고 말았다. 조 학예연구사는 “청자를 굽던 장인이 전국으로 흩어져서 분청사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강진에 있던 청자를 굽던 가마터는 문을 닫았다”라며 “조선이 시작되면서 고려청자는 역사 속으로 묻히고 말았다”고 설명했다.

강진의 가마터가 다시 관심받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조선의 문화에 대해서 유럽이나 미국에서 관심을 가졌는데, 조선의 백자와 함께 고려청자까지 주목받은 것이다. 그러다 1910년 일제가 강진 일대를 조사했다. 6.25전쟁 후에는 관심이 저조하다가 1960년대 국가에서 문화재를 조사하고 1963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고려청자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조 학예연구사는 “조사가 이뤄지니 강진주민도 이 지역의 역사적 중요성을 알게 됐다”라며 “군에서도 청자를 재현하기 시작했고, 기구 등을 만들어 알려나가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보통 고려청자하면 일반 시민은 대표적인 것만 알고 있으나 그 외에 중요한 유물이 많다”며 “전시를 통해 계속 소개해 나가도록 힘쓰겠다”고 덧붙였다. 
 

고려청자를 굽던 가마터 ⓒ천지일보 2018.7.30
고려청자를 굽던 가마터 ⓒ천지일보 2018.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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