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규 作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사람들은 자신에게 ‘무엇을 아는가(Que sais-je)’라는 물음표를 던질 때가 종종 있다. 이러한 질문은 자아를 찾아가는 노정일 수도 있고 회의주의적 사색의 이정표일 수도 있다.

몽테뉴의 글을 읽고 에세이를 쓴 박홍규 선생의 글을 보노라면 자신이 아는 것에 갇혀 편협하고 오만한 사고를 하지 않는지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자기 기준에서 타인을 판단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16세기에 살았던 한 자연인의 사상이 이성을 신뢰하는 21세기 사회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보다 더 이성·합리적이고 자유롭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내가 과연 아는 것이 무엇일까’라고 묻게 된다.

간단한 물음 하나가 인간의 이성을 확대시키는 것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우물 안의 개구리’ 마냥 우월주의에 빠지고, 한 시각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 오늘날 우리에게 열린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박홍규 선생은 ‘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에 몽테뉴의 ‘에세’를 읽으면서 읽었던 기분을 담았다. 지극히 이성적이면서 합리적인 몽테뉴를 발견한 박 선생은 ‘에세’를 읽을 때마다 허심탄회하게 웃을 수박에 없는 이유를 낱낱이 이야기하고 있다.

박 선생은 “그를 읽는 것이 곧 나를 읽는 것이다. 따라서 즐겁다”며 “몽테뉴를 읽는 것은 못 견디게 재미있다”고 서슴없이 말할 정도로 몽테뉴의 ‘명쾌함’에 깊이 빠졌다.

세기와 국경을 초월한 자유로운 두 영혼이 만났다. 이들은 자연주의를 회치고 회의주의를 외친다. 여기서 회의주의는 허무·허탈과 정 반대임을 알아야 한다. 자아를 올곧이 알고자 관념에서 시작할 뿐 냉소적으로 사회를 관망하지 않는다.

몽테뉴의 경우 자유로운 르네상스인이었다. 당시 신교도와 구교도 간 종교전쟁과 국경을 둘러싼 유럽국가 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영향을 받은 그는 그 귀족과 민중을 구분치 않는 등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나’라는 개인을 해부하며 고백했다. 가족과 종교가 달랐고 회의주의적 비판정신을 가진 몽테뉴는 서슴지 않고 종파에 대한 편견을 비판했다. 아울러 극단주의를 경계하며 깨어있는 감성과 이성으로 자기중심을 다져 나갔다.

우리나라에서 소개된 ‘몽테뉴’는 굉장히 어려운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이는 번역계의 어려움을 반영한 듯 현재 몽테뉴 ‘에세’를 ‘잘’ 번역한 책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번역가도, 불문학자도 아닌 박홍규 선생이 직접 나섰다. 그는 책에 인용한 ‘에세’를 직접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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