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는 직물산업이 발달한 곳이다. 그 중 하나가 이불의 안감이나 기저귓감 따위로 쓰는 피륙인 ‘소창’이다. 사진은 두 줄로 나란히 놓인 기계에 소창이 두루마리 휴지처럼 ‘도르르' 말리고 있는 모습(ⓒ천지일보 2018.7.24
강화도는 직물산업이 발달한 곳이다. 그 중 하나가 이불의 안감이나 기저귓감 따위로 쓰는 피륙인 ‘소창’이다. 사진은 두 줄로 나란히 놓인 기계에 소창을짜기 전 실타래가 두루마리 휴지처럼 ‘도르르' 말리고 있는 모습(ⓒ천지일보 2018.7.24

강화도 ‘소창’ 공장 가보니
남아 있는 공장도 사라질 위기
현황과 기록 남기는 작업 중요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철컥 철컥 철컥.’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두 줄로 가지런히 놓인 수십 개의 기계에는 흰 천이 마치 두루마리 휴지처럼 ‘도르르’ 말리고 있었다.

이곳은 1960~1980년대 강화도의 대표 직물산업인 ‘소창’을 만드는 공장이다. 외부에서 보면 여느 농가의 집과 비슷했다. 하지만 그 안으로는 소창의 명맥을 잇는 분주한 손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집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니 이곳의 주인인 최모씨가 소창 제작의 첫 단계에 속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는 해외에서 수입해온 노르스름한 색의 실을 하얗게 만드는 과정이다.

최씨는 “천을 만드는 과정에서 재질이 뭉치지 않게 한다”라며 “또한 천이 습기를 빨아들이는 성질을 갖게 하기에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라고 설명했다. 최씨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이어져온 소창 제작의 일을 이어받아 본업으로 삼고 있었다. 평균 35도를 육박하는 무더위에 공장 안은 후덥지근했지만 소창 작업의 맥을 잇고자 하는 최씨의 사명감의 열기는 더욱 뜨거운 듯 했다.

소창 결이 마치 벌집모양과 같이 정교하다 ⓒ천지일보 2018.7.24
소창을 짜기 전의 결이 마치 벌집모양과 같이 정교하다 ⓒ천지일보 2018.7.24

◆강화직물 산업의 발달

장장식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의 설명에 따르면, 소창은 ‘생지’와 ‘흰 소창’ 등 두 종류로 나뉜다. 해외에서 수입해온 실을 그대로 사용해 만드는 약간 누런색의 면 소재가 ‘생지’다. 누런 실을 표백해서 하얗게 만드는 것은 ‘흰 소창’이다. 소창은 친환경적인 소재여서 불 안감이나 아기 기저귀에도 사용되며, 교복이나 양복 등에 사용될 만큼 일상과 밀접해 있다. 또한 소창은 공업용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사용된다.

이곳 강화도는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소창 등 직물 산업이 발달해온 곳이었다. 특히 20세기 전반 강화도 직물 산업의 위상은 대단했다. 실제로 1912년 ‘직물사업 발전계획’이 수립된 후 1917년 강화직물조합이 설립됐다. 1923년의 한 신문기사에 따르면, 직물로는 강화군을 제일로 하며 각 군에 걸쳐 많은 양이 생산됐다. 특히 강화군은 기업의 소지로 개량기대의 보급을 꾀함과 산업에 대한 자각을 환기했고, 전 조선에 걸쳐 판로를 확장했다.

1942년 조선총독부 고시 제337호인 ‘강화직물 최고 판매가격’에 따르면, 당시 소창직(폭 36 x 길이 24)의 소매업자 최고 판매가격은 12.36원이다. 이는 ‘견면 평직’의 소매업자 최고 판매가격 17.07원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가격이다. 방직산업의 발달로 1960년대에 소창은 계속 생산됐고 1980년대에는 100곳에 이르는 소창 공장이 존재했다.강화도에 소창사업이 발달하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에 농촌 경제 부흥에 힘쓴 강화도 유지인 황우천씨의 노력이 있어서였다.

이에 대해 수십년간 방직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박용묵씨는 “처음에는 소창을 짤 수 있는 면사가 없었다”라며 “일제강점기에 광목을 짜고 나면 자투리가 나오는데 황우천씨가 풀을 발라 길게 이었다”고 말했다. 처음 제작된 소창지는 아주 얇았고, 가정에 보급된 후 족답기(발로 디디는 힘을 동력으로 하여 돌리는 기계)를 통해 소창지가 점차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웬만한 집의 마루나 사랑채에는 족답기가 하나씩 있었다. 이를 통해 각 가정에서는 짜인 소창은 시장에 내다팔아 수입을 얻었다. 이후 소창을 짜는 기계는 계속 발달됐다.

건조되고 있는 소창 ⓒ천지일보 2018.7.24
건조되고 있는 실타래 ⓒ천지일보 2018.7.24

◆하나둘 사라지는 소창 공장

특히 강화도 여성들의 손재주가 소창 발달에 큰 몫을 담당했다. 박씨는 “강화 사람은 손재주가 좋고 부지런했다”며 “해방에서 6.25전쟁 사이에 강화읍에 공장이 30~40개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피난 간 사람들에 의해 아래지방에도 방직산업이 전파되기 시작했고 대구에까지 전해지게 됐다”고 강조했다. 특히 강화도와 달리 대구는 원료 가공기술까지 겸비하게 됐다.

이에 대구는 면직물의 생산지로 탈바꿈됐다. 반면 강화도의 방직산업은 쇠퇴의 길을 걸었다. 그러함에도 여전히 강화도에서는 소창이 생산되고 있다.

수십년간 방직산업에 종사한 박용묵씨가 소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8.7.24
수십년간 방직산업에 종사한 박용묵씨가 소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8.7.24

박씨는 그 이유에 대해 “소창은 기계화로 하면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가내공업 형태인 소규모로 생산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1978년에는 강화도에서 소창이 과잉 생산됐다. 이에 정부는 보상을 조건으로 직물기계수를 줄이도록 했다. 이로 인해 소창 생산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오늘날 남은 10곳에서만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장장식 학예연구관은 “근대 직물의 한 축을 담당했던 직물이 현대에 와서 소멸위기에 놓여 있다”라며 “전국에서 소창은 오직 강화에만 남아있으며 앞으로 근대의 역사를 이어온 현황과 기록을 남겨는 작업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수십년간 방직산업에 종사한 박용묵씨가 강화도의 소창 산업에 대한 조사를 나온 국립민속박물관 장장식 학예연구관과 그 일행들에게 이곳 터에 있던 방직산업과 관련된 공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8.7.24
수십년간 방직산업에 종사한 박용묵씨가 강화도의 소창 산업에 대한 조사를 나온 국립민속박물관 장장식 학예연구관과 그 일행들에게 이곳 터에 있던 방직산업과 관련된 공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8.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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