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사는 국민의 피와 눈물로 이뤄낸 거대한 투쟁의 산물이다.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 맞서 ‘국권’을 찾기 위한 독립투쟁과 뒤이어 독재정권에 맞서 ‘주권’을 찾기 위한 민주화 투쟁까지 그 전선의 선두에는 늘 ‘국민’이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 얼마나 많은 우리 국민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산화해 갔는지 우리는 아직도 그 고통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 깊은 산 어느 골짜기에서 들리는 새들의 울음소리가, 또는 광야에 피어있는 이름 모를 들꽃의 향기가 혹 그들의 몸짓인지 애써 위로할 뿐이다.

해방과 분단 이후 현대정치사의 최대 질곡은 갓 피어나려는 민주주의의 뿌리마저 짓밟았던 군사 독재정권과의 기나긴 싸움이었다. 군홧발에 짓밟힌 채 피흘리고 통곡하며 싸워왔던 그 역사가 그대로 한국 민주주의의 서막이 된 것이다. 우리는 불과 30여년 전만 해도 군사 독재정권 치하에 있었다. 그리고 그 잔혹했던 군사정권의 심장부에는 이름을 달리 했던 지금의 ‘기무사’가 있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기무사의 역사가 이처럼 오랫동안 군사 독재정권과 밀착됐다는 사실은 우리 국군의 아픈 역사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기무사, 이제는 환골탈태해야 한다

우리 헌법 5조 2항은 국군의 ‘정치적 중립성’을 적시하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너무도 당연한 그 규범이 헌법 ‘총강’에 적시된 것은 그만큼 오랫동안 국군이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특히 기무사는 군사 독재정권의 ‘주구’ 역할을 해왔다는 비판이 많았다. 이승만 정권에서부터 박정희, 전두환·노태우 정권에 이르기까지 기무사의 역사를 보면 그 아픈 역사가 더욱 생생할 것이다.

군사 독재정권이 붕괴된 지 벌써 한 세대가 흘렀다. 그 사이 대한민국의 민주화 수준도 놀랄 만큼 높아졌다. 사회 각 부문마다 과거 군사 독재정권 시절의 어두운 그림자는 찾기조차 어렵다. 세상이 확 바뀐 것이다. 따라서 군의 정치개입을 우려하는 국민이 지금 얼마나 될까 싶을 정도로 국군도 벌써 제자리를 찾은 지 오래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려오는 박근혜 정부 때의 기무사 관련 소식은 정말 귀를 의심케 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 때 피해자 유족들을 사찰하거나 촛불시위 때 위수령과 계엄령을 발동하는 문건을 작성했다는 소식은 정말 믿고 싶지 않은 얘기이기 때문이다.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국군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의 그 눈빛이 다시 떠오른 것은 필자만의 망상이었을까. 그로부터 37년 뒤 이번에는 광화문 촛불시위에 위수령과 계엄령을 검토했다니, 분노를 넘어 참담한 심정을 억누르기 어렵다. 기무사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것인지 아니면 일부 정치군인들의 쿠데타 음모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다만 헌법에 명시된 국군의 정치적 중립성과 ‘국군기무사령부령’ 제3조에 적시된 ‘직무’를 이탈한 것은 분명하다는 점이다.

많이 늦긴 했지만 최근 기무사의 계엄 문건을 수사하기 위해 ‘특별수사단’이 꾸려졌으며 기무사 실무자들을 불러 조사하는 등 본격적인 수사를 벌이고 있다. 하지만 이 사안에 접근하는 문재인 정부의 자세는 크게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임명 당시 때도 자질 논란에 휩싸였던 송영무 국방장관은 기무사의 반헌법적, 반민주적 일탈행위를 알고도 오랫동안 쉬쉬하며 시간만 보냈다. 송 장관은 지난 3월 16일 이석구 기무사령관으로부터 관련 문건을 보고 받은 뒤 청와대에 공식 보고한 것은 그로부터 100일이 지난 6월 28일이었다. 왜 늦게 보고 했느냐는 질문에 송 장관은 ‘6.13지방선거’를 언급했다. 한마디로 선거에 영향을 미칠 것 같아 의도적으로 보고 시점을 미뤘다는 얘기다. 말 그대로 어불성설이요, 그 자체가 이미 정치적인 태도이다. 국가의 중대한 안보 문제까지 국방부 장관마저 선거를 이유로 타이밍을 조율한다면 앞으로 국방부 발표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송 장관은 청와대에 언제, 누구에게, 또 어떤 내용을 보고했는지 설명조차 오락가락이다. 뭔가를 숨기려는 듯한 모습에 다름 아니다. 송 장관은 앞서 청와대 보고 시점을 4월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청와대가 반박하자 다시 계엄 문건의 ‘존재’와 내용을 ‘간략히 언급만’ 했다고 말을 바꿨다. 이 무슨 말인가. 계엄 문건이 있긴 있는데 보여 줄 수는 없고 내용도 맛보기만 살짝 흘렸다는 말인가. 청와대 회의가 그런 자리란 말인가. 그리고 송 장관의 계엄 문건 얘기를 듣고도 청와대 참모들은 별 일 아니라는 식으로 그냥 넘어갔다는 말인가. 실제로 계엄 문건은 그로부터도 두 달이 넘어, 지방선거를 지나서 6월 28일에야 청와대에 공식 보고됐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 후인 지난 7월 5일에야 언론에 공개된다. 국방부와 청와대의 이처럼 무책임하고 안이한 태도는 국민의 지탄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이제 와서 기무사 조직을 축소하겠다, 대통령과의 독대를 차단하고 법적 권한도 구체화하겠다는 등의 개선방안이 쏟아지고 있다. 물론 기무사 개혁은 서둘러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세월호 참사 당시 팽목항 주변을 어슬렁거렸던 기무사 요원들, 계엄 문건을 지시하고 작성한 핵심 인사들에 대한 엄중한 조사와 ‘일벌백계’는 명확히 해야 한다. 그래야 ‘피플파워’를 제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계엄 문건이 어디까지 실행에 들어갔는지도 철저하게 밝혀야 한다. 자칫 국가안보와 국민의 생명까지 또다시 군홧발에 짓밟힐 수 있었던 ‘국기문란’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문건의 존재를 알고도 쉬쉬했던 송 장관을 비롯한 군 관계자들에 대한 징계도 예외가 돼서는 안 된다. 문재인 정부에서의 국방부마저 대충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어렵게 구성된 특별수사단, 이번만큼은 군 당국의 ‘셀프수사’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