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서진(西晋)은 바보황제 혜제의 황후 가남풍(賈南風)의 발호로 갖가지 모순이 폭발해 18년 동안 8왕의 내란이 일어나 한가닥 생기마저 사라졌다. 흉노족 유연(劉淵)과 유요(劉曜)의 후조(後趙)가 건국됐고, 갈족(羯族) 석륵(石勒)도 유연에게 투항해 핵심세력으로 성장하면서 자립을 도모했다. 소설 후삼국지에서는 석륵을 조자룡의 후손으로 묘사했다. 서진의 병주자사 유곤(劉琨)과 유주자사 왕준(王浚)은 강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중원에서 일정한 세력을 구축했다. 북방통일을 노린 석륵은 장빈(張賓)의 건의에 따라 양국(襄國)을 점령하고 왕준과 유곤의 제거를 목표로 삼았다.

석륵은 우선 왕준을 공격목표로 삼았지만, 유곤이 배후를 노릴 것이 걱정됐다. 석륵의 모사 장빈은 둘의 갈등을 이용해 유곤에게 호의를 보이자고 건의했다. 계책에 넘어 간 유곤은 과연 움직이지 않았다. 석륵은 친히 경기병을 이끌고 유주를 습격한 후 재빨리 계주에 도착했다. 왕준은 석륵이 자신을 황제로 옹립하려고 왔다고 오판해 잔치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입성한 석륵은 선물로 가져온 수천 마리의 소와 양을 성 안으로 풀어놓았다. 성 안에 있을 복병에 대비한 조치였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왕준이 나섰지만 이미 늦었다. 왕준은 참수됐다. 유곤은 비로소 석륵의 계략에 말려들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어서 석륵은 유곤의 부장 한거(韓据)와 기담(箕澹)을 잇달아 대파했다. 병주를 지키던 이홍(李弘)은 투항했다. 본거지를 잃은 유곤은 단필제(段匹磾)에게 투항했다가 피살됐다. 하북의 두 강적을 동시에 제거한 석륵은 대흥(大興) 2년(319), 조왕으로 자립했다가 10년 후에 전조를 멸하고 관농지역을 겸병한 후 황제로 등극했다. 석륵은 서진에서 십육국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걸출한 정치가로 부상했다. 그는 노예의 신분에서 점차 상승해 후조의 황제가 되어 황하유역을 석권했다. 뛰어난 군사적 능력 덕분이었지만 왕준과 유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것처럼 모략도 대단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두 개의 공격목표를 정하고 잇달아 두 사람과 연합한 다음 각개 격파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진을 배반하고 왕으로 자립하려던 왕준은 석륵의 우선 공격목표가 되기에 적합했다. 그는 먼저 왕준에게 천자로 옹립하겠다고 약속했다. 왕준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석륵의 실력과 진심을 파악하려고 사신을 파견했다. 그러나 석륵이 한 수 위였다. 석륵은 정예부대를 숨기고 노약자 중심의 부대를 내세웠으며, 왕준의 정적 유통이 보낸 사신을 왕준에게 보내주었다. 왕준의 의심이 풀리자 석륵은 왕준을 제왕으로 옹립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공개적으로 군사를 동원했다. 누가 보아도 석륵의 출병은 당연했지만, 왕준은 거기에 살기가 숨어 있는 것을 몰랐다. 

우호를 가장하고 칭신을 한 것은 왕준의 경계심을 풀기 위한 계략이었다. 석륵은 유곤에게 사신을 파견해 진왕실에 충성을 맹세함으로써 그의 정상적인 판단능력을 마비시켰다. 이것으로 왕준을 기습하기 위한 조건이 모두 마련됐다. 경기병 수천 기를 이끌고 왕준의 거점까지 육박한 석륵은 또다시 수천 마리의 가축으로 왕준의 의심을 푸는 동시에 성내에 숨겨두었을지도 모르는 복병에 대비하는 치밀함을 보여주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부중에서 나온 왕준을 사로잡은 것은 석륵의 솜씨는 민첩했다. 왕준이 피살된 후에 고립무원에 빠진 유곤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의 존망은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병주를 잃고 단필제에게 도망친 유곤은 이미 아무런 장애요인이 되지 못했다. 적전분열이 초래한 결과였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