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는 꿈의 바다다. 지중해는 전쟁과 평화와 역사와 문화와 예술과 풍요와 낭만의 바다다. 하지만 지금은 종교와 민족 간의 분쟁과 전쟁으로 발생한 난민에겐 꼭 건너야 할 죽음과 저주의 바다가 돼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처럼 온갖 사연을 품은 지중해, 그 가운데서도 마치 협곡과도 같은 ‘에게해’가 있다. 이 에게해를 둘러싼 도시국가들 간 또는 외부와의 도전과 응전이야말로 인류 문명의 흐름을 놓고 볼 때, 동방에서 서방으로 문명의 축이 이동하는 길목에서 빚어지는 대하드라마와 같은 논픽션이었다.

필자는 이 작은 협곡 ‘에게해’의 각축 속에서 오늘날 이 한반도가 얻어야 할 메시지를 발견했다.

먼저는 BC 480년경 치러진 그리스와 페르시아와의 3차 해전 즉, 살라미스해전이다. 이 때 그리스는 아테네 밑에 위치한 에게해의 또 다른 작은 해협으로 페르시아군을 단계별 유인책을 쓰며 불러들였고, 한 편으로는 패잔병을 남겨 그리스군대가 전의를 잃은 채 퇴각을 생각하고 있다는 거짓기만술까지 동원했다. 실전에서는 좁은 해협에서 돛을 이용하는 페르시아의 대함과 노를 저어 기민하게 이동하는 작은 배와의 전투로 기습공격을 받은 페르시아 대군은 당황하며 혼비백산 퇴각했고, 결국 그 후유증으로 페르시아의 몰락을 가져오면서 영원할 것만 같았던 페르시아 대제국은 종말을 맞으며 그리스와 헬레니즘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 살라미스해전은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대첩과 함께 세계 3대 해전사에 이름이 올라 있을 정도로 전술과 지략이 뛰어났으며 인류 역사 지형도에 주는 의미 또한 남다르다. 오늘날 협상 용어 중 하나인 ‘살라미 전술’이 바로 이 살라미스 해전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즉, 살라미 전술은 협상을 일괄타결이 아닌 단계별로 진행하므로 자신들의 뜻을 하나씩 하나씩 관철시켜 간다는 고도의 계산이 깔린 협상전략이다. 마치 에게해에서 피아가 한 판 붙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지역으로 끌어들이면서, 한편으로는 적을 안심시키면서 자신들이 유리한 상황으로 모든 환경을 만들어서 결국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무서운 전략이다. 지금 남과 북 내지 북과 미와의 협상에서 북한이 사용하는 전술이기도 하다.

에게해가 주는 교훈 하나가 또 있다.

BC 800년경 호메로스가 지은 대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딧세이가 있다. 이 중 일리아드는 ‘트로이 전쟁에 관한 시’라는 뜻이며, 그리스가 난공불락의 성인 트로이성(BC 12세기경 초기 그리스시대에 터키의 소아시아 지방에서 번성했던 도시국가)을 어떻게 침공했느냐를 알 수 있게 하는 내용이다.

그리스군대는 난공불락이라는 말처럼 무너지지 않는 트로이성을 함락시키고 지중해를 건너 객지에서 10년 동안 이어진 지리한 전쟁을 끝내기 위해 새로운 전략을 수립한다. 바로 거대한 ‘목마’를 만들어 트로이성 문밖에 세워 놓았다. 그리고 ‘시논’이라는 첩자를 통해 목마는 아테네 여신을 위해 만든 것이며, 저렇게 크게 만든 것은 트로이군이 목마를 성안으로 운반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며, 예언자가 말하기를 목마가 트로이 손에 들어가면 트로이가 승리한다는 거짓 소문을 트로이성에 퍼트렸다. 트로이 역시 전쟁에 지쳐 첩자가 퍼뜨린 거짓에 속아 거대한 목마를 트로이성 안으로 옮기기 위해 자신의 성을 허물었고, 성 안으로 들어간 거대한 목마 안에 숨어 있던 그리스군대는 밤에 목마에서 나와 성의 문들을 다 열게 되고 밖에서 대기하던 그리스군대는 성 안으로 진격하므로 난공불락의 성 트로이는 그렇게 허무하게 함락되고 말았다. 평화의 선물인 양 커다란 목마를 성 문 앞에 남겨두고 지쳐 퇴각하는 듯한 상황을 연출하고, 시논을 통해 꾸민 계략은 바로 거짓 평화전술이었다.

그래도 트로이에는 지혜 있는 자가 있었다. 바로 제사장 라오콘이었다. 그는 당시 목마는 적의 계략이라고 외쳤다. 목마에는 무서운 음모가 담겨있고, 목마 뱃속에는 무엇인가 숨겨져 있다고 했다. 그러나 전쟁에 지친 트로이는 제사장 라오콘의 경고를 무시했고 목마는 성 안으로 옮겨졌다. 원래 목마는 승리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평화를 갈망하는 그들에겐 저주와 멸망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4월 27일, 판문점에서는 남북 두 정상이 만났다. 그리고 김정은 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 아니 전쟁이라는 불안에 떨고 사는 남한에 평화라는 거대하고 꿈에 부푼 목마를 안겨 줬다.

지금 대한민국에도 트로이의 제사장 라오콘이 있어 목마 속에 담긴 음모를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평화를 싫어하는 그대는 그러면 전쟁을 하자는 거냐”며 무시한다. 그 어떤 경고도 발붙일 곳이 없어졌다. 자기 혈족과 인민을 스스럼없이 죽이는 지도자가 주는 평화는 트로이 목마일 가능성이 높다.

이 같은 생각은 객관성을 가진 합리적 의심이며 나아가 이치다.

동서고금의 역사는 거울이고 교훈이다. 우리 선조들의 혜안과 선인과 역사와 이치를 무시하고 거스르는 우매한 지도자와 백성이 돼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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