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백은영 기자]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분연히 일어난 이들이 있었다. 예로부터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았던 만큼 우리 민족은 나라를 지켜내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릴 줄 알았던 민족이었다.
특히 지도자들보다 백성들, 흔히 민초라 불리는 이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쟁기 대신 총ㆍ칼을 손에 들었으며, 글밖에 모르던 이들이 붓 대신 칼을 들었다.
아직 어린 학생들은 학교가 아닌 총알이 빗발치는 광장으로 나가야만 했다. 이렇듯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이들. 때로는 글로 때로는 총ㆍ칼로 내 민족, 내 나라를 지켜낸 이들의 대부분은 종교를 가진 종교인들이었다. 누구보다 앞장서서 외세와 맞서 싸워야 했던 이들의 모습을 통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문학인-심훈, 한용운, 윤동주, 이육사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行列)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저항시 중 하나인 심훈의 <그날이 오면>의 일부다. 심훈의 시와 계몽소설 <상록수>를 보면 기독교적인 색채를 찾을 수 있는데 이는 그의 형 심명섭이 서울 창천교회와 중앙교회 목사로 있으면서 받은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

심훈을 비롯해 주권을 잃은 나라의 국민으로 당시 지식인이라 불리는 이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할 수 있었던 것은 글을 통한 저항의식 고취였을 것이다.

저항시의 대표적인 작가로 꼽히는 만해 한용운과 윤동주 또한 그러했다. 더욱이 이들은 종교인으로서 각 종교가 추구하는 자비, 희생, 사랑을 실천한 인물들이기도 하다.

한용운은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였으며, 윤동주는 유아세례를 받을 정도로 집안이 독실한 기독교였다. 이육사의 시에는 종교적 색채가 많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어릴 때부터 유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 김윤후 장군의 승리를 기념하는 대몽항쟁전승기념탑.
고려시대-김윤후 장군
13세기 유라시아 대부분을 제패한 최강의 몽골군마저 벌벌 떨었던 고려의 장군이 있었으니 바로 용인지역의 승려였던 김윤후 장군이다.

40여 년 동안 계속된 고려와 몽골의 싸움에서 김윤후는 2번이나 몽골군을 패퇴시켰다. 그는 몽골의 2차 침입 때인 1232년(고종 19년) 당시 침입 총사령관이자 몽골군의 중심인물인 살리타 장군을 화살로 쏴 사살해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두 번째 승리는 1252년 몽골이 고려 정벌을 끝내겠다는 각오로 전략적 요충지인 충주로 들어왔을 때로 끝까지 항전하는 김윤후와 몽골군의 싸움은 70여 일을 넘겼다.

그 사이 성 안의 양식이 떨어지고 투항을 원하는 백성들의 목소리가 커지자 김윤후는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노비문서를 불태워버리고 노획한 소와 말을 모두 나눠주고 항쟁의지를 고취시켰다.

이는 신분제 사회였던 고려시대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파격적인 조치로 결국 몽골군은 충주에서 패퇴하게 된다.

조선시대-임진왜란
조선시대는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유교가 양반 사대부들의 정신적 가치로 자리 잡고 있을 때였다. 유교 정신이라 하면 곧 충효 정신을 떠올릴 정도로 이 시대 부모와 나라를 위한 효와 충성은 나라를 지키는 원동력이 됐다고 할 수 있다.

▲ 이순신 장군.
이순신 장군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조선의 장군은 단연 이순신 장군이었다.

일평생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무관이자 불패정신과 창의성을 가진 이순신의 정신은 당대에는 물론 지금도 가히 뛰어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

절대적인 수적 열세 속에서 큰 해전을 치러야 하는 수군의 장수들에게 굳은 정신력을 가지고 싸움에 임할 것을 당부하며 이른 말로 다음 날 명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은 위와 같은 결사의 정신으로 전투에 임해 13대 133이라는 엄청난 전투력의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한다. (난중일기 1597. 9.15 기록)

▲ 사명당 유정스님.
사명당 유정스님
어려서 조부 밑에서 공부를 하고 1556년(명종 11년) 13세 때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孟子)>를 배우다가 황악산(黃岳山) 직지사(直指寺)의 신묵(信默)을 찾아 승려가 됐다.

1561년(명종 16년) 승과(僧科)에 급제하고, 1575년(선조 8년)에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초빙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 휴정(休靜: 서산대사)의 법을 이어받았다.

평양을 수복하고 도원수 권율과 의령에서 왜군을 격파했으며, 정유재란 때 울산의 도산과 순천 예교에서 전공을 세웠다. 1604년 일본으로 건너가 강화를 맺고 조선인 포로 3000여 명을 인솔해 귀국했다.

“왜적들이 저렇게 잔인하니 우리 백성들을 함부로 죽일까 두렵다. 내가 마땅히 가서 저 광포한 왜적들을 타일러 흉한 무기를 못 쓰게 하는 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자비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석장비문> 중)

일제강점기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0년 8월 29일은 한일 강제병합이 이뤄진 국치일로 주권을 잃은 슬픈 날이었다. 그렇지만 그로부터 35년 후인 1945년 8월 15일,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을 버렸던 독립지사와 순국선열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광복을 맞을 수 있었다.

▲ 종교인들로 구성된 민족대표 33인.

민족대표 33인
1919년 3.1운동 때 한국의 독립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민족대표 33인은 모두 종교인이었다. 독립선언서의 작성은 천도교 측이 담당했으며 독립선언서 인쇄 또한 천도교 측의 오세창이 총책임을 담당하고, 천도교 직영의 인쇄소인 보성사 사장 이종일이 총실무를 담당했다.

독립선언서의 배포는 오세창의 총책임 아래 천도교, 그리스도교, 불교, 학생단 등으로 분담, 독립선언서 서명과 날인에 참여한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 15명, 그리스도교 16명, 불교 2명으로 구성됐다.

▲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민족의 독립을 위해 애쓴 백범 김구 선생.
백범 김구 선생
김구 선생은 항일무력활동을 시작,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1932년 일본왕 사쿠라다몬(櫻田門) 저격사건, 상하이 홍커우(虹口)공원 일본왕 생일축하식장의 폭탄투척사건 등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 등의 의거를 지휘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로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백범일지 중 ‘나의 소원’)

6.25 한국전쟁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같은 민족이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눌 수밖에 없었던 전쟁은 남과 북 모두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폐허가 된 나라의 재건축, 전쟁고아들을 위해 팔을 걷어붙인 이들 또한 대부분이 종교인이었다. 각 종교단체는 고아원이나 봉사단체를 만들어 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지 않은 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줬다.

▲ 무료병원 운영과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통해 이웃사랑을 실천한 장기려 박사.
장기려 박사
무료병원 운영과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통해 인술을 펼친 장기려 박사는 북녘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 지낸 민족분단의 희생자이기도 했다.

언젠가 가족을 만날 것이라는 희망 하나로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시작한 그는 전쟁 후 가난과 궁핍한 생활 속에서 병들어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이들을 위해 한평생을 바쳤다.

병원장이나 대학 학장으로 받는 월급보다 무료 환자를 위해 가불한 돈이 더 많아 오히려 적자를 면치 못할 정도로 인술과 사랑을 동시에 펼쳤던 장기려 박사.

그는 “의사를 한 번도 못보고 죽어 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고 말할 정도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었다.

춘원 이광수의 소설 <사랑> 주인공 ‘안빈’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있는 성자’ 장기려 박사를 가리켜 이광수는 “당신은 성자 아니면 바보요”라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 강원용 목사, 김수환 추기경, 법정스님은 사회 화합과 종교 간 소통에 힘쓴 종교계의 거목이었다.

사회 화합과 종교 간 소통 힘쓴 종교계 거목
강원용 목사, 김수환 추기경, 법정스님

개신교의 강원용(1917~2006) 목사, 가톨릭의 김수환(1922~2009) 추기경, 불교의 법정스님(1932~2010)은 종교를 넘어 한국 사회에 큰 발자취를 남긴 어른들이다.

이들은 종교는 달랐지만 사랑과 희생, 자비 그리고 사회ㆍ종교 화합과 평화를 위해 종교 간의 벽을 허물고 소통의 장을 여는 데 앞장섰다.

또한 이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고통을 나누며, 생태계 보호 등 공동선을 추구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평생을 소외된 이웃을 위해 헌신한 고 김수환 추기경이 마지막 남긴 말은 ‘사랑하라’였다.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았다. 서로 사랑하라.”
(고 김수환 추기경 유언 中)

현재
작금의 사회를 보고 있노라면 민망하고 안타까운 일이 너무도 많다. 서로 사랑하며 살기에도 모자란 시간을 서로 저주하고 핍박하며, 헐뜯는 모습이 여러 매체에 의해 공개된다.

경술국치 100년, 6.25 한국전쟁 60년, 광복 65주년을 맞는 올해 뼈아픈 과거를 회상하며 광복의 기쁨을 나누지만 진정한 광복을 위해 노력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진정한 광복이란 정신의 광복까지도 맞이하는 것으로 일제강점기로 잃어버린 문화와 민족정신을 회복하는 것이자, 물질문명에 물든 세속 문화를 정신문명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 진정한 광복, 빛의 회복을 위해 앞장서서 외치는 이들은 누구인가.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일, 나라가 어렵고 힘겨울 때마다 앞장서서 하나 되기를 원하는 이들은 분명 어느 시대라도 존재했다. 오늘날도 분열된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종교의 벽을 넘어 서로가 사랑하길 원하는 이들이 있기에 보다 희망찬 대한민국을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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