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사)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북한의 운명을 결정지을 폼페이오의 세 번째 평양방문 동안 김정은 위원장은 평안북도 창성별장과 개마고원의 감자밭에 있었다. 인민들의 먹는 문제 해결을 위해 고군분투 한다는 인상을 주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할지 모르나 지금 김정은 위원장은 너무 한가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비핵화가 늦어지면 북한의 운명은 앞당겨진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미국의 제재는 한 치도 풀리지 않았으며 다만 시진핑 주석의 달콤한 유혹만이 김정은의 귓전을 때렸을 뿐인데도 말이다. 세상물정을 모르는 데는 미국도 마찬가지가 아닌지 모르겠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비핵화가 길어질 것이란 막연한 소리로 미국 국민들을 달래기에 바쁘다.

지난주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빈손으로 평양에서 돌아온 것을 보며 미국이 북한을 깊이 ‘학습’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은 전리품에만 관심이 있지, 전 재산을 도박판에 올려놓은 북한의 심정을 깊이 고려하지 않고 있다. 북한으로선 종전협정을 맺고 핵 목록 신고를 하면 적어도 북-미 대표부 정도는 개설하고, 미국에 핵 검증을 맡기면 북-미 수교와 체제보장 선언 정도는 받아낼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반면 미국은 요구는 섬세하지만, 보상에 대해선 ‘일단 빨리 다 내놓으면 그 다음은 만사 오케이’라는 식이다. 폼페이오 장관이 8일 베트남에서 한 발언이 대표적 사례다. 

그는 “김정은이 기회를 잡는다면, 미국과의 정상적 외교 관계와 번영으로 가는 베트남의 길을 따라갈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 기회를 잡으면 베트남의 기적은 당신(김정은)의 기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언론은 ‘미국이 베트남의 기적을 북한의 롤모델로 제시했다’고 보도했다. 베트남이 미군 유해 송환으로 신뢰를 쌓고 미국과 국교 수립을 했고 각종 제재를 푼 뒤 국제기구에 가입한 것은 사실이나, 이는 전형적인 미국의 시각이다. 그러나 김정은의 시각에서도 보자. 베트남은 30년 넘게 개혁개방 정책을 펴고 있는 나라지만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은 2000달러 남짓(세계 130위권)이다. 과연 김정은의 눈에 베트남이 ‘번영의 기적을 쓰고 있는 롤모델’로 보일까.

특히 베트남은 1979년 ‘신경제정책’을 발표한 뒤 1986년 ‘도이머이 정책’을 내놓기까지 4차례나 공산당 지도부가 바뀌었다. 보수파와 개혁파의 치열한 권력투쟁 끝에 전임 지도부에 실수와 능력 부족의 책임을 확실히 물은 뒤 개혁개방의 노선을 확정했다. 지도자가 실수할 수도 없고, 책임질 일도 없는 북한으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모델이다. 폼페이오 장관이 북한에 베트남을 롤모델로 언급한 것은 그만큼 미국이 얼마나 북한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 또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중동에서 수없이 되풀이된 미국의 특정 국가에 대한 몰이해, 그로 인한 실패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북한에서 반복될까 봐 우려스럽다. 차라리 미국이 26년 동안 집권하며 싱가포르의 번영을 이끈 리콴유의 길을 따르라 했다면 김정은은 더 솔깃했을 것이다. 리콴유는 장남인 리셴룽이 총리가 된 뒤에도 90세 가까이 ‘선임장관’이란 이름으로 나라를 실질적으로 통치했고, 죽은 뒤에도 ‘국부’로 추앙받고 있다. 싱가포르는 북한과 마찬가지로 강국에 둘러싸여 늘 안보 위협 속에 살아왔음에도 일당독재를 유지했고, 국가가 기업을 경영하며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성장에 성공했다. 김정은이 매력을 느낄 요소가 베트남에 비교할 바가 없이 많은 나라다. 그 밖에도 김정은이 롤모델로 참고할 나라는 많다. 싱가포르처럼 가난한 어촌에서 세계적 도시로 성장한 중국의 ‘선전 모델’은 어떤가. 리콴유도 “선전의 미래는 곧 중국의 미래”라고 예언했다. 선전은 중국식 시장경제의 시험무대로 대성공을 거두었고, 중국 개혁개방의 기관차가 됐다. 북한에도 개성, 신의주, 나선, 원산처럼 선전의 역할을 할 도시들이 있다. 

또 선전을 만든 덩샤오핑(鄧小平)이 모방했던 박정희식 개발모델도 있다. 위의 사례들은 모두 세계에서 평가받는 모델들이지만, 다 과거일 뿐이다. 21세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사는 김정은은 새로운 ‘김정은식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가령 김정은은 좁은 국토와 부족한 자원을 4차 산업혁명 인재 양성으로 극복해 가는 에스토니아 모델도 적극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북한이 4차 산업혁명 인재 양성 시스템을 제대로 갖춘다면 20∼30년 뒤 한반도의 주도권을 가질 수도 있다. 최고 지도자란 사람이 감자밭의 밭고랑에 연연하며 감자 몇 톤을 캤느냐 관심 가질 것이 아니라 많은 인재들을 외국으로 유학 보내 4차 산업의 인재를 키우고 비핵화를 서둘러 마치는 데 바로 북한의 ‘체제보장’이 있다는 것을 김정은 위원장은 하루 빨리 깨달아야 할 것이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