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올바른 절 수행(修行)
[종교칼럼] 올바른 절 수행(修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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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 김덕수

요즘 사람들은 거의가 마음이 들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행동거지(行動擧止)가 조급하여 참을성이 없어졌답니다. 옛날 같으면 서로 이해하고 참을 일도 공연히 트집을 잡고 화를 불쑥불쑥 냅니다.

마음이 착 가라앉지 않으면 맑은 정신은 우러날 수가 없고, 그래서 더욱 물질에 팔려 물질의 부림을 받고, 그래서 물질의 노예가 됩니다. 남녀노소(男女老少)를 막론하고 장난감이나 기호품에 팔려 있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오히려 어린아이들보다 나이가 들수록 물건에 팔린 정도가 심합니다. 그래서 사회에서 어른들이 어른 노릇을 못하고 젊은 세대들에게 권위를 상실한 지가 오래입니다.

예를 들어 걸음걸이 하나를 봐도 다들 수선스럽게 걷지 진중한 모양새를 눈을 씻고도 찾아보기 힘든 현실입니다. 논어(論語)에 구용(九容)이 나오고 능엄경에 위의(威儀)를 말씀하심은 몸가짐-지신(持身) 또는 위신(偉身)-의 중요성을 언급한 것입니다.

참다운 위의는 몸에서 자연스레 우러나는 겸손과 자신의 할 노릇을 제대로 하는 데서 우러나는 법입니다. 요즘은 겸손과 겸양의 미덕은 오히려 바보 취급을 당하며 자신들의 분수를 모르고 천방지축 날뛰니 예와 도덕은 실추되고 세상은 혼란스럽기가 그 유래를 찾기 힘듭니다.

이런 와중에 불가에 있어 108배나 3천배 등의 수행은 생활 속에서 몸을 조심스럽게 가져 예(禮)를 행하며 위의를  갖는, 그러면서 몸이 건강해지는, 참으로 훌륭한 방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방편도 제대로 행하지 않으면 병폐가 붙습니다.

그러면 절 수행은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요? 첫째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정성스러움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또 자신의 호흡(呼吸)에 맞춰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 지적하고 싶은 것은 꼭 ‘수행은 절에 가서 하는 것이다’는 잘못된 관행입니다.

이제는 잘못된 풍습이나 제도, 관행을 척결하고 오롯이 바르게 해 나가야 할 때입니다. 도(道)는 평범한 생활 속에 있는 것이지 특별하거나 장소에 제한된 것이 아닙니다. ‘가정과 집을 법당(法堂)으로 만들어라’ 이 말이 진리요, 오늘을 사는 재가불자(在家佛者)에게 가장 절실한 말이 아닌가 합니다.

가정과 집을 놔두고 그 어디 가서 불법을 구한단 말입니까? 가정 내에서 웃어른을 잘 시봉(侍奉)하고 지어미와 지아비가 서로 떠받들고 존중하면서 살아가면 그곳이 극락이요 불국토며 그 속에서 아이들은 제대로 성장하게 됩니다.

절 법당에 나가지 않으면 기도가 제대로 안 된다고들 합니다. 참으로 큰 병이 붙은 것이죠. 여기서 기도(祈禱)란 말도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고려말에 나라 안팎 상황이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불교도 복을 구하는 기복(祈福)신앙으로 부처님께 복을 비는 폐단이 성행하게 된 것이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한번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 봅시다. 내가 열심히 마음을 닦고 선업을 쌓아 복이 되는 것이지, 나무로 된 부처님상 앞에 음식 올리고 복전함에  돈 가득 넣고  부처님께 복을 빌어 소원이 성취된다면 그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3천년 전에 이 땅에 오신 고타마 싯달타의 위대함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 정신 차리고 살자는 그 한마디 아닐까요? 결국 잘못된 기도신앙이 물질의 팽배(澎湃)와 서로 한통속 되어 오늘의 사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재가불자들이 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정정진(正精進)을 통해 불교의 혁신을 이루어내야 합니다.

오늘부터 집안을 법당처럼 깨끗하게 정돈하고서 집에서 108배 수행을 해 보십시오. 집안의 기운이 단박에 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꾸준히 밀어붙이면 어느 순간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럴수록 더욱 진중하고 정성스럽게 해 나갑니다. 그래서 다리의 근력도 키워지고 절과 호흡이 하나가 되면 그 때 시간을 여유 있게 잡아 3천배도 해보면 심화(心火)를 다스리고 관상도 바꿀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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