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우리는 송강 정철을 조선시대 대표적인 문학가로 손꼽았다. 학창시절 선생님들의 칭송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지금도 그가 남긴 문학 업적은 대단한 존경을 받는다. 그러나 정치인으로서는 어떠했는가?

정철은 돈녕부 판관 정유침의 4남 3녀 중 넷째였다. 그는 중종 31년(1536)에 서울 장의동(현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나름대로 괜찮은 가문이었다. 그의 누이가 계림대군에게 시집을 가 왕실과는 사돈 관계였다. 그러나 그 매형이 을사사화에 연루되면서 부족한 게 없었던 정철의 집안은 풍비박산을 맞았다. 계림대군은 모진 고문 끝에 능지처참을 당했고, 이조전랑이었던 정철의 형은 곤장을 맞아 죽었다. 아버지는 귀양을 갔고 집안은 그대로 몰락해 버렸다. 정철은 어린 나이에 벌써 정치의 혹독한 쓴맛을 보았다.

뼈저린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생생히 남아 있는 그로서는 어른이 되어서도 어떡하든 권력의 중심부에 서 있지 않으면 위태롭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권력의 차디찬 비정함을 깨달은 그는 강경한 정치인으로 성장해야만 했다. 자신이 정한 원칙에 따라 행동하면서 결코 굽힐 줄 몰라 타협이 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집안이 몰락하자 정철은 가세가 어려워 제대로 학문을 배우지 못했다. 얼마 뒤 명종의 탄생으로 귀양 갔던 아버지가 석방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가솔을 이끌고 선친의 산소가 있는 전라도 창평으로 거처를 옮겼다.

정철은 명종 17년에 문과에 급제할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벼슬길로 나선 그는 군학들과 벗하며 작가적 소질을 키웠고, 또 그 무렵 당대의 유명한 문장가와 유학자들에게 학문을 배우고 교류했다. 양응정 임석천 김인후 송순 기대승 등에게 수학하고, 이이 성혼 송익필과 친분을 다졌다.

정철은 탄핵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날 때마다 전라도 창평이나 담양으로 내려가 지냈다. 그는 담양에서 임금이 하루 속히 자신을 불러주지 않는 것에 실망하여 세월을 원망하며 술과 문학을 벗삼아 세월을 죽이고 있었다. 정철은 그곳에서 훌륭한 가사문학 몇 편을 발표했다.

‘사미인곡’은 그 중 대표적 작품이었다. 그러나 그 사미인곡을 놓고 당대의 손꼽는 문인들이 시비를 걸었다. 사미인곡은 당나라 조정에서 벼슬을 한 시인 왕유의 상사가(相思歌)를 표절한 것이라고 몰아 세웠다. 왕유는 ‘안록산의 난’ 때 도적들에게 붙잡혀 본의 아니게 부역을 하고 풀려난 인물이었다. 그 사실이 알려져 그는 목숨을 잃을 지경에 이르자 ‘사상가’를 지어 황제에게 바쳐 위기를 모면했다.

정철은 탄핵을 받아 벼슬에서 쫓겨난 신세였다. 그가 반성의 기색도 없이 왕유의 시를 표절이나 하여 오로지 조정으로 복기하기 위해 비굴하게 임금을 미인에 비유하여 현혹했다는 것이었다. 정철은 그들의 비난에도 개의치 않았다. 뱁새들이 황새의 뜻을 어찌 알겠느냐는 듯 시치미를 떼었다.

어쨌든 정철은 파란곡절을 겪으면서도 권모술수가 요동치는 정치판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어린 시절 겪었던 혹독한 정치 경험은 강박관념에 젖어 있게 만들었다. 정철은 어떤 식이든 자신은 조정 권력의 중앙에 서 있어야 했다.

결국 끝없는 그의 탐욕으로 조선 최대의 사화(기축)를 일으킨 장본인 중 한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장자방이라 일컫는 송익필과 모의하여 정여립 역모사건을 연출했다. 오직 중앙 조정으로 복귀하여 자신의 권력 장악을 위해 죄 없는 동인세력을 천여 명이나 살상하는 유래 없는 참극을 벌였다.

그가 어린 시절 겪었던 참혹한 기억을 극복하고 문학에만 전념했더라면 떳떳하지 못한 표절 시비를 불러일으킬 ‘사미인곡’은 탄생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기축사화의 참극도 없었을 것이다.

그가 혼란스러운 정치판에서 일찌감치 손을 씻고 문학의 한 우물만 팠더라면 후세인들이 진정으로 우러러 볼 세계적인 문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문학의 천재가 정치의 마력에 빨려들어 사후에 아름답지 못한 이름을 남겨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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