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남측에서 바라본 광경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10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남측에서 바라본 광경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10

한적한 시골마을이 휴전회담 장소로

회담 장소에선 설전, 전선에선 혈전

도끼만행사건으로 분할경비 서게 돼

[천지일보=백은영 기자] 판문점은 서울에서 52㎞, 개성에서 10㎞ 지점의 휴전선 상에 있으면서도 155마일 휴전선에 유일하게 철책이 없는 구역이다. 공식 이름은 유엔군사령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Joint Security Area)’, 일반적으로 공동경비구역(JSA) 또는 판문점이라 부른다. 대한민국 행정구역상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어룡리, 북한 행정구역상으로는 개성특급시 판문군 판문점리에 해당하지만 공식적으로는 남과 북 어느 쪽 영토도 아니다.

동서 800m, 남북 600m의 네모꼴 JSA에는 유엔사령부 측과 공산 측(북한, 중국)이 군사정전위원회 회의 운영을 위해 1953년 10월 군사정전위원회 본부 구역의 군사분계선(MDL) 상에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장’을 설치, 휴전선 상에 유일하게 철책 없이 남북한군이 얼굴을 맞대고 있는 곳이다.

JSA 남측에는 ‘자유의 집’, 북측에는 ‘판문각’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그 옆으로 각각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남측 ‘평화의 집’과 북측 ‘통일각’이 있다. 판문점은 주로 휴전을 관리하는 장소로 이용돼 오다가 1971년 8월 남북적십자 예비회담, 1972년 7월 7.4 남북공동성명 채택 등 군사정전위원회 회담이나 남북한 주요 회담을 위한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판문점  휴전회담  광경ⓒ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10
판문점 휴전회담 광경ⓒ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10

널문리에 얽힌 역사

판문(板門)이란 우리말로 ‘널문’ 또는 ‘널빤지 문’인데, 1750년대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해동지도〉의 「장단부 지도」에 ‘판적교(板積橋)’라는 다리가 보이는데, 이 근처에 현재의 판문점이 있다.

그 얼마 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팔도군현지도〉의 「장단부 지도」와 1782년에 조선 정부가 편찬한 〈1872년 지방지도〉의 「장단부 지도」에 ‘판문교(板門橋)’가 나타난다.〈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일성록〉〈내각일기〉 등에는 이곳을 ‘판문평(板門平)’이라고 한 지명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이곳이 수도 송도(개성)의 교외에 있어 한량들의 놀이터로 유명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인 1592년 4월 29일 피난길에 오른 선조가 판문점 부근에서 장단부사 마고연이 마련해 온 음식을 먹고 의주로 발걸음을 재촉했던 곳이기도 했다.

6.25전쟁 전 널문리는 콩밭과 초가 3채, 작은 주막이 전부인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는데, 휴전 회담 장소가 되면서 갑자기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판문점이란 이름도 마을 이름을 휴전회담 공용어인 한국어 중국어 영어로 표기해야 했는데, ‘널문리’를 중국어로 표기하기가 어려워 널문의 한자 ‘판문(板門)’에 가게를 의미하는 ‘점(店)’자를 넣어 새로 판문점이라고 만들었다고 한다.

6.25전쟁  휴전협정  조인식  장면(1953.  7.  27).  유엔군  측  윌리엄  패리슨(왼쪽),  북한  인민군  사령관  남일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10
6.25전쟁 휴전협정 조인식 장면(1953. 7. 27). 유엔군 측 윌리엄 패리슨(왼쪽), 북한 인민군 사령관 남일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10

처음에는 개성에서 회담

휴전이 논의되게 된 과정은 이렇다. 6.25전쟁은 T34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무력 앞에 발발 1달여 만에 낙동강까지 밀렸다.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반전의 계기를 마련하여 3일 후인 9월 18일 서울을 탈환했다. 10월 1일에는 국군이 38선을 돌파하여 11월에는 압록강과 함경도까지 진격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하자 중국이 100만 대군을 투입하며 참전했다. 1951년 1월, 중화인민의용군과 북한인민군이 대대적인 동계 공세를 가해와 다시 서울을 빼앗겼다.

1951년 6월, 전쟁이 1년간 계속되면서 공산군은 유엔군의 막강한 화력 앞에 점차 열세를 보이며, 자신들의 힘으로 한반도 전역을 석권할 수 없고, 전쟁이 수년간 장기화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김일성은 마오쩌둥(毛澤東)을 방문하고, 중국 대표단과 함께 모스크바로 갔다. 1951년 6월 13일 김일성과 중국 및 소련의 스탈린은 “38도선의 경계선을 복구하는 조건”으로 휴전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열흘 뒤인 6월 23일 유엔 주재 소련 대표 말리크가 유엔방송을 통해 휴전협상을 제의하였다. 미국이 소련의 제의를 받아들여 1951년 7월 8일 첫 예비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회담 장소는 개성 북쪽 고려동 396번지 옛 요정 내봉장(來鳳莊)이었다.

판문점 휴전회담 장소 (1951)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10
판문점 휴전회담 장소 (1951)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10

개성의 내봉장이 회담장이 된 것은 문산에서 개성 시내를 통과하지 않고 바로 올 수 있는 조용한 곳이고, 북한군 관할 하에 회담장을 잡도록 한 스탈린의 지침을 따른 것이었다. 벽돌담에 둘러싸인 내봉장은 각종 정원수와 화분이 있는 300평 넘는 정원에 연못과 아담한

정자가 있는 우아한 기와집이었다. 정원의 정자를 지나면 사랑채가 ᄀ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그 안쪽의 안채가 정전회담 장소였다. 사랑채는 공산 측의 대합실로 쓰고, 유엔군 측에는 안채 우편에 천막을 쳐서 대합실을 만들었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이 왼쪽과 오른쪽에 두 개 있었기 때문에 회담장에 들어오거나 나갈 때 좌익인 공산군 대표들은 언제나 왼쪽 문을, 유엔군 대표단은 오른쪽 문을 이용했다.

7월 8일 쌍방의 연락장교회의를 통하여 절차 문제를 합의한 후 7월 10일 날 쌍방 대표의 상견례에 이어 7월 11일부터 본격적인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회담은 공산 측의 정치적 주장을 앞세우는 바람에 공전하다 16일 만인 7월 26일에야 비로소 군사분계선 설정, 휴전감시방법 및 그 기구의 설치, 포로교환에 관한 협정, 쌍방의 당사국 정부에 대한 건의 등의 의제합의를 보았다.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회담 장소 주변에서 북한군이 의도적으로 무력시위를 벌였다. 9월 6일 유엔군 사령관 릿지웨이는 회담 장소의 중립성 문제를 들어 회담 장소를 변경할 것을 공산군 측에 통첩했다.

군사분계선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10
군사분계선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10

판문점 휴전회담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 연락장교단은 10월 22일 지금의 휴전선 북방 800m 지점의 콩밭 옆에 초가집 3채와 주막을 겸한 가게 1채가 있는 널문리를 중심으로 직경 1㎞의 원형지역에 천막을 세워 회담 장소를 정하고, 그 위치를 지도 위에 표시하여 서로 교환하였다.

양측은 휴전회담이 결렬될 때를 대비하여 최종 합의에 도달할 때까지 군사작전을 계속한다는 전제 하에 휴전회담을 시작하였다. 양측은 회담을 압박하기 위해, 또한 휴전 시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 회담장에서는 설전(舌戰)이, 전선에서는 혈전(血戰)이 전개되었다. 유명한 백마고지 전투 등이 휴전회담이 진행되던 시기에 벌어졌다.

쌍방의 군사분계선으로 공산군 측은 38도선을 주장했고, 유엔군 측은 현재의 전선으로 할 것을 주장했는데, 유엔군 측의 주장이 관철됨으로써 현재와 같이 동부 강원도 쪽이 북으로 올라간 휴전선이 되었다. 1951년 11월 27일 군사분계선 설정 협정에 조인하였다. 이에 따라 휴전선 남북 양쪽 2㎞씩 4㎞의 비무장지대를 두는 등 논의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다. 그러다 포로교환 방식에서 제동이 걸렸다. 공산군 측은 전원 맞교환을, 유엔군 측은 포로의 자유선택에 의한 희망자 교환으로 대립되어 2년을 끌었다. 본회의 159회를 비롯하여 총 765회에 이르는 각종 회의를 거쳐 드디어 1953년 7월 27일 10시 휴전협정 조인식을 갖게 되었다. 조인식을 위해 현재의 휴전선 북방 약 800m 비무장지대에 약 200평의 목조건물을 세웠다. 이 건물은 현재 북한이 ‘평화의 전당’이라고 하여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협정 조인은 유엔군 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조선)군사정전 협정>이라는 이름을 가진 휴전협정을 조인하게 되었다.

판문점은 중립지대였기 때문에 모든 전투행위가 금지됐다. 중립지대임을 알리기 위해 눈에 잘 띄는 열기구를 띄어 미연의 사고를 방지하고자 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10
판문점은 중립지대였기 때문에 모든 전투행위가 금지됐다. 중립지대임을 알리기 위해 눈에 잘 띄는 열기구를 띄어 미연의 사고를 방지하고자 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10

그 후의 판문점

휴전을 관리하기 위하여 판문점에 중립국감독위원회 본부가 설치되어 있으며, 중립국인 스웨덴·스위스(유엔군 측 지명)와 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공산군 측 지명) 등 4개국의 감시위원이 상주하고 있다. 휴전이 장기화됨에 따라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장과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을 비롯한 부속 건물들이 항구적인 건물로 바뀌었고, ‘자유의 집(1965)’과 ‘판문각(1968)’ 등 콘크리트 건물도 들어섰으며, 1971년 9월 20일 남북적십자예비회담이 시작된 것을 계기로, 판문점은 군사정전위원회의 회담장소만이 아니라 남북한 간의 직접적인 접촉과 회담을 위한 장소로 활용되고 남북대화의 빈도가 잦아지자 ‘평화의 집(남쪽)’과 ‘통일각’(북쪽)‘ 등 남북대화용 건물도 자리를 잡게 되었다.

원래 판문점구역은 유엔군과 공산군, 즉 적대하는 쌍방군대가 공점공유(共占共有)하는 공동

관리구역으로 특이한 구역이다. 그러나 1976년 8월 18일 미루나무 절단 작업을 하던 유엔군 측 경비병에 대한 북한경비병의 도끼살인 만행을 계기로 쌍방경비병을 휴전선을 경계로 분리시켜, 공동관리업무 가운데 경비업무는 분할경비를 하게 되었다.

남북이 철조망 없이 만날 수 있는 곳에서 남북으로 오가는 통로가 되기도 하는 판문점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 북한 중앙통신사 부사장 이수근의 위장 자수 사건(1967. 3. 22), 푸에블로호 미군 승무원 82명과 유해 1구(장교 6명, 사병 75명, 민간인 2명) 송환(1968. 12. 23), 남북적십자 예비회담(1971. 9. 20), 7.4 남북공동성명을 하게 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비밀방북(1972. 5. 2)과 북한의 박성철 부주석 내방(5. 29),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했던 전대협 대표 임수경의 육로 귀환(1989. 8. 15), 남북고위급회담(1990), 현대그룹 명예회장 정주영의 소떼 방북(1998. 6. 16), 비전향장기수 66명의 송환(2000. 9. 2) 등이 있다.

이런 판문점에서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간의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남북 정상회담은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위원장 간의 미북정상회담으로 이어지게 됐다. 65년간 이어온 판문점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고, 미국과 북한의 수교,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일들이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가시화될 수 있느냐 하는 중요한 국면을 맞았다. 판문점은 그 어느 때보다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글: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사)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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