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淸白吏)를 아는가. 청렴결백한 공직자를 의미하며, 오늘날 청백리상을 수여할 정도로 유명하다. 청백리 제도는 고려시대부터 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200여명의 청백리가 배출됐다. 도덕·효·인 등의 덕목을 겸비, 이상적인 관직자인 조선의 청백리를 알아보자.

맹사성 선생 집터 (제공: 문학박사 조성린씨)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10
맹사성 선생 집터 (제공: 문학박사 조성린씨)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10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맹사성 선생은 조선의 청백리 중 한 사람이다. 맹사성의 할아버지는 군수 맹유(孟裕)이고 아버지는 한성판윤 맹희도(孟希道)다. 본관은 신창(新昌)이다.

맹사성은 고려 병인년(1386) 문과에서 장원했다. 조선이 건국된 뒤 태조 때 예조의랑(정4품)이 됐는데 태조 5년(1396) 판한성부사 계림군 정희계의 시호를 너무 나쁘게 지었는데도 그냥 있었다고 하여 파직됐다가 바로 복직됐다. 정미년(1427)에 정승이 돼 좌의정에 이르렀다. 

맹사성은 지극히 효도하고 청백한 인물이었다. 그가 살고 거처하는 집은 비바람을 가리지 못했으며, 소타기를 좋아했다.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했다.

맹사성은 청결하고 검소하며 고아해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고, 식량은 늘 녹미(祿米)로 했다. 무인기문(戊寅記聞)에 따르면, 어느 날 햅쌀로 밥을 지어 올렸더니 맹사성이 “어디에서 쌀을 얻어왔소” 하고 물었다. 그 부인이 답하기를 “녹미가 오래 묵어서 먹을 수 없기에 이웃집에서 빌렸습니다” 하니, 맹사성이 싫어하며 말하기를 “이미 녹을 받았으니 그 녹미를 먹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무엇 때문에 빌렸소”라고 했다.

맹사성은 온양으로 성묘하러 왕래할 적에도 관아에 들지 않고 하인도 단출하게 하고 다녔다. 한번은 양성과 진위의 현감이 맹사성이 고향에 내려간다는 말을 듣고 장호원에서 기다리다가 웬 사람이 소를 타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하인을 시켜 물러나라고 꾸짖었다.

맹사성은 현감이 보낸 하인에게 “온양 맹고불이라고 하여라” 하니 하인이 그대로 보고했다. 두 현감은 놀라고 당황해 황급히 달려 나오다가 인수(印綬, 관인)가 옆 연못에 떨어지는 줄도 몰랐다. 이에 뒷사람들이 “인수가 떨어진 못(인침연, 印沈淵)”이라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음악에 조예가 있어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즐겼으며 품성이 어질고 부드러웠다.

그러나 조정의 중요한 정사를 논의할 때에는 결단성이 있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니 충성과 신의가 있고 예로써 사람을 대접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고 곧고 깨끗하게 절조를 지킴을 정(貞)이라 했다.

정리=장수경 기자
도움말=문학박사 조성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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