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봉수교회에서 지난 2011년 11월3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평양 봉수교회에서 남북 그리스도인 평화통일공동기도회를 진행하고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출처: NCCK)
평양 봉수교회에서 지난 2011년 11월3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평양 봉수교회에서 남북 그리스도인 평화통일공동기도회를 진행하고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출처: NCCK)

태영호 전 공사, 선교회에 밝혀

‘교황 방북초청 취소’ 뒷이야기도

“어용이라도 北에 교회 세워야”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어용이라 할지라도 북한에 많은 교회가 세워지도록 힘써야 한다. 그리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양질의 콘텐츠를 제작해 모든 방법을 동원해 북한 내부로 들여보내야 한다. 이럴 때 북한 주민들의 의식이 변한다. 의식이 변하는 것은 어느 순간에 엄청난 폭발적 전기를 마련할 수 있다.”

북한 외교관이었던 전 태영호 공사가 개신교 선교단체 모퉁이돌선교회에 이같이 밝혔다. 모퉁이돌선교회는 7월 ‘카타콤소식지’를 통해 태영호 공사가 밝힌 북한 주민들의 종교 실태에 대해 알렸다. 선교회는 지난 6월 12일 북미정상회담 직후 태영호 공사를 만나 북한 현지상황을 들었다.

태영호 공사는 먼저 기독교말살정책을 단행했던 북한이 왜 1980년대 후반 공식적인 교회를 세우게 됐는지 배경을 설명했다.

해방 이후 김일성은 철저한 종교탄압 특히 기독교 말살정책을 꾸준히 단행했고, 1968년에는 “우리 공화국에서 종교는 완전히 멸절됐다”고 단언했다.

모든 공산주의 국가에서 종교탄압이 자행되지만 말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북한은 해방 이후 그 많은 교회를 깡그리 깨부수고 종교를 완전히 말살시켰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김일성은 분명히 기독교의 정신을 알고 있었고, 그걸 수령체제를 공고히 하는 데 이용했다. ‘진짜 종교’는 위협이 됐을 뿐이다.

◆ 기독교 말살정책… 돌연 교회 건축

한국 종교인이 북한을 방문하면 북한 종교계 인사가 종교시설을 안내하며 신앙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선전한다. 종교의식에 참관하고 나면 종교의 자유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태 공사는 “착각이다”며 “북한의 사회주의 헌법에도 종교의 자유가 명시돼 있지만 북한에는 헌법보다 높은 법이 있다. 김씨 3대의 ‘말씀’ ‘당의 유일적 지도체제 확립을 위한 10대 원칙’ ‘조선노동당규약’과 같은 수령과 당의 정책 등”이라고 말했다.

태 공사의 설명에 따르면 북한 노동당의 정책은 주체사상 또는 김일성, 김정일 주의만을 믿어야 한다고 규정돼 있으므로 북한에서 종교를 가진다는 것은 당의 정책에 반대하는 행위다. 북한은 6.25전쟁 이후 미국에 대한 북한 주민의 적개심을 종교에 돌리며 철저히 종교를 탄압했다. 교인들은 적대계층으로 분류되며 감시와 통제를 당했다. 1970년대 김일성은 ‘북한주민들이 노동당만을 믿고 살고 있으므로 종교문제는 해결됐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랬던 김일성은 돌연 종교단체의 활동을 재개시켰다. 왜 그랬을까.

1980년대 한국에 민주화투쟁의 열기가 뜨거웠다. 김일성은 한국 종교단체들이 민주화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보고, 이들을 통해 적화통일전략의 통일전선을 구축하려는 목적에 이용할 구실이 필요했다. 태 공사는 “북한에도 기독교가 존재하고 있음을 내세워 한국의 반정부 종교단체들과의 교류를 확대해 이들을 포섭하려는 속샘으로 1988년에 평양에 봉수교회와 장충성당을 건설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초기 교회와 성당은 가짜 신자로 채워졌다. 당은 종교활동에 대해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투쟁 활동이다. 미제와의 반미 성전에 떨쳐나선 남조선 종교계인사들을 쟁취하기 위한 그리고 조국의 통일을 위한 숭고한 투쟁이다”고 특별강습을 시킨 후 종교시설에 투입시켰다. 초기에는 북한 당 간부들을 종교시설에 출석을 시키기 어려웠다. 많은 여성들이 ‘아프다, 집에 갑자기 일이 생겼다’는 핑계를 대며 빠지기 일쑤였다.

◆ 선전용 ‘가짜 신앙’의 역습

그런데 어느 순간 변화가 감지됐다. 출석에 대한 통제가 완화됐음에도 교회나 성당에 나오는 여성 수가 오히려 늘었다. 자발적인 출석률이 100%가 됐다. 조금만 아파도 안나오던 이들이 고열로 끙끙 앓아도 종교활동은 빼먹지 않고 나오게 됐다는 설명이다.

당은 ‘진짜 신앙’이 생겼음을 간파하고 ‘위험 요소’로 판단했다. 당은 교회 주변에 접근하는 사람들 즉 숨어 있는 신도를 색출하기 위해 봉수교회 주변 아파트에 망원경을 설치했다.

이후 놀라운 일이 관찰됐다. 찬송가 소리가 들려오면 청년 몇 명이 나타나 교회담장에 기대 무엇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보위부는 이 청년들을 체포했다. 이들은 음악대학 작곡반 학생들이었다. 1980년대 북한 음악대학에서는 자유주의 국가의 명곡을 가르치지 않았고, 행진곡풍의 4분의 2박자 곡들을 가르치고 만들도록 했다. 그런데 찬송가 선율은 달랐다. 한 음악대학 학생은 이 선율을 듣고 급우에게 알렸고, 찬송가 악보를 얻고 싶었지만 교회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학생들은 교회 담장 밖에서 몰래 찬송가를 듣고 채보하다가 붙잡혀 경고를 받고 풀려났다.

당이 더 충격을 받았던 사건이 있었다. 교회에서 종교의식을 하는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나타나 어김없이 그 옆길을 서성이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채포해 조사하니 예전부터 믿었던 신자였다. 김일성은 북한에 더는 신자가 없고 종교문제는 해결됐다고 선언했지만 교인들의 신앙은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당국의 탄압이 두려워 신앙을 버렸다고 했을 뿐이었다.

◆ 북한, 교황 초청 추진하다 철회

태영호 공사는 자신이 직접 겪은 경험담도 털어놓았다. 그는 1991년 조직된 북한 외무성 내 상무조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상무조는 북한이 교황을 평양에 초청하기 위해 만들어진 임시 조직이었다. 당시 외교적으로 고립상태에 놓였던 김일성은 교황이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마다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던 뉴스를 보고 교황을 초대하면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기대했다.

그러나 바티칸 교황청에서는 “북한에 진짜 가톨릭 신자가 있다면 바티칸에 데려와달라”고 요구했다.

북한 노동당 가톨릭교회협회는 사회안전부 주민등록부를 뒤져 6.25 전쟁 전까지 독실했던 신자 할머니를 찾아냈다. 당은 이 할머니에게 “아직도 하느님을 믿느냐”고 물었고, 할머니는 처음에는 정색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신자를 찾아 로마 교황청에 보내야 할 필요성이 있어서 묻는 것이라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대답이 바뀌었다. 이 할머니는 “한 번 마음속에 들어오신 하느님은 절대로 떠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당 간부는 할머니에게 어떻게 신앙을 지켜왔는지 물었고, 할머니는 당 간부를 집 뒷담에 꾸려진 예배단으로 데려갔다.

당원은 할머니에게 바티칸에 한 번 가셔야 하겠다고 말했고 당시 할머니는 하늘을 바라보며 “하느님, 일생을 열심히 기도를 드렸더니 이렇게 어린 양을 불러주시네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일을 통해 노동당은 종교의 ‘무서움’을 절감하게 됐다는 일화다.

태 공사는 “노동당은 교황이 평양에 오면 실제로 북한에 가톨릭 열풍이 일 것이 두려워 더 이상 교황 초청을 추진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김일성은 봉수교회 외에도 원산이나 강계 등 지방 주요도시에 10개 교회를 건축하라고 지시했지만 봉수교회와 장충성당을 통해 주민들의 사상에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해 더 이상 성당이나 교회를 세우지 않기로 결정했다. 외부에 보여주기 위해 교회나 성당을 지었다가는 체제를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태영호 공사는 “한국교회는 이 같은 사실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며 “북한에 각 지방과 도시마다 많은 교회가 세워지게 된다면 북한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릴 수 있다. 그러므로 북한에 더 많은 교회가 세워질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고 조언했다.

모퉁이돌선교회는 “북한선교가 다급한 상황임에도 무뎌져 미동조차 하지 않는 우리를 향해 나귀의 입을 통해 발람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를 깨우시고 도전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경고의 소리로 들려진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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