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정다준 기자] 지난 1일부터 시행된 52시간 근무제로 판교 일대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야근으로 꺼지지 않는 불빛 때문에 ‘오징어배’라고 불렸던 판교도 야근이 줄어들면서 빌딩의 불빛이 사라지고 있다. 사진은 4일 밤 10시(왼쪽)와 자정께 NC소프트 주변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5
[천지일보=정다준 기자] 지난 1일부터 시행된 52시간 근무제로 판교 일대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야근으로 꺼지지 않는 불빛 때문에 ‘오징어배’라고 불렸던 판교도 야근이 줄어들면서 빌딩의 불빛이 사라지고 있다. 사진은 4일 밤 10시(왼쪽)와 자정께 NC소프트 주변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5

직장인, 대체로 정책 환영

“여가 시간 어떻게 활용할까”

 

택시기사 등 경기 침체 우려

“손님없어 앞으로가 더 걱정”

[천지일보=김정필 정다준 기자] #1. “이번 주부터 시행된 52시간 근무제 덕분에 퇴근 시간이 빨라져 여가생활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퇴근 이후에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계획을 세워야 할 것 같습니다.”

#2. “요즘 ‘탄력근무제’다 ‘워라밸’이다 기업에서 여러 가지로 직원들 복지 혜택이 늘어나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이렇게 사람이 없어서 오늘도 사납금을 다 못 채울까 걱정입니다.”

최근 정부가 주 52시간으로 근로 시간을 단축하면서 판교 일대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지만 이에 대한 반응이 엇갈리고 있다. 판교 직장인들은 야근이 줄어 만족도가 높은 반면, 택시·대리운전기사들이나 주변 상권은 한숨이 깊어지고 있다.

기자가 지난 4일 찾은 판교는 야근으로 꺼지지 않는 불빛 때문에 ‘오징어배’라고 불렸던 곳이었지만, 야근이 줄어든 덕분에 퇴근 이후 시간이 늘어 직장인의 만족도가 높아졌다.

판교에서 한 IT업계 근무자인 A(40대, 남)씨는 “현재 회사 내에서 정부의 정책에 맞게 사규에 주 52시간제를 적용해 시행하고 있다”며 “도입 초기라 직원들이 아직 적응하고 있는 단계지만 기존에 야근을 하며 늦게까지 일하던 모습은 많이 줄어든 것 같다”고 말했다.

게임을 개발하고 있는 B(30대, 남)씨는 “오후 10시가 지나면 왜 퇴근하지 않고 일하는지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며 “요즘은 야근을 지양하고 있다”고 전했다.

판교 일대 IT, 게임 업계에서는 주 52시간 도입 이전에도 오전 8시부터 오후 10시 사이에 일을 하고 조직별 의무근로시간대 ‘코어타임’을 설정하는 등 탄력근무제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대체로 잘 이뤄지지 않는 분위기였다.

IT업계에서 일하는 C(30대, 여)씨는 달라진 근무 환경에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근무 시간이 끝나도 일찍 퇴근하는 것이 눈치 보였는데 이번 주부터는 회사에서 적극적으로 퇴근을 권하고 있다”며 “기존에 탄력근무제도도 있었지만 제대로 이용하기 어려웠다. 지금은 주 52시간 도입으로 업무 효율이 높아진 것 같다”고 설명했다.

게임 업계에서 일하는 D(30대, 여)씨도 “워킹맘으로 일한 지 1년 정도 됐는데 보통 5시쯤 퇴근한다. 오늘은 며칠 뒤 집안에 행사가 있어 미리 더 일하고 가는 길”이라며 “아이가 있는 여성들은 이번에 시행되는 제도가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표했다.

하지만 주 52시간 도입이 업계의 현실을 반영하지 않았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보안 소프트웨어 업계에서 일하는 E(20대, 남)씨는 “컴퓨터 관련 분야는 시스템 업그레이드, 서버 점검 등의 문제로 야근이 필요한 경우가 상당수 있다. 때문에 업무량은 많은데 남은 업무는 집에서 해야 할 것 같다”며 “실제 업계 상황에 맞는 정책 시행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택시·대리기사들이나 주변 상점들은 손님이 줄어 근심이 커져가고 있다. 가뜩이나 손님이 많지 않는데 이보다 더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날 오후 9시께부터 판교 내 IT·게임 업체 건물 주위로 택시가 줄지어 있었다. 야근을 하고 늦게 귀가하는 손님을 태우기 위해서다. 하지만 택시기사들은 한 시간 넘게 기다려도 손님을 태우지 못했다고 하소연했다.

판교 주변에서 3년째 택시운전을 하고 있는 J(50대, 남)씨는 “늦어도 보통 30분마다 손님이 있는데 오늘은 같은 장소에서 한 시간 넘게 기다리고 있다”면서 “요즘 회사에서 직원들 복지로 퇴근 시간도 자유롭고 주 52시간제 도입으로 손님을 더 찾아볼 수 없다”고 토로했다.

같은 업계에 종사하는 K(50대, 남)씨도 손님이 없어 걱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K씨는 “나는 이분들보다 1시간 일찍 와서 맨 앞줄에 정차해놨는데 아직 손님을 태우지 못했다”며 “이렇게 계속 손님이 없으면 뭘 먹고 살지 막막하다”고 푸념했다.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한 대리운전자 L(40대, 남)씨도 대리운전 전화가 오지 않아 초조해하고 있었다. 판교에서 서울로 손님을 태운다는 L씨는 “지난주까지만 해도 오후 11시쯤 되면 손님을 볼 수 있었는데 이번 주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면서 “이런 제도가 시행된 것을 알았다면 오늘 판교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판교 주변 상점들도 예전보다 손님들의 발길이 뜸해 침울해하는 분위기다. 음식점을 하고 있는 M(50대, 여)씨는 “여기서 장사를 한지 1년 정도 됐는데, 요즘 기업에서 구내식당도 운영하고 야근도 없다 보니 매출이 확 떨어졌다”며 “이 건물 내 많은 점포들이 6개월도 채 안 돼 폐업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했다. 이어 “직원들의 복지 향상뿐만 아니라 주변 상권도 같이 상생할 수 있는 대안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건너편에서 슈퍼마켓을 운영 중인 O(50대, 여)씨도 매출이 줄어 걱정이다. 그는 주 52시간제가 시행된 지 몰랐다면서 “월요일부터 이상하게 사람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직장인들이 계속 일찍 퇴근하게 될 텐데 앞으로가 더 걱정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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