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주공단은 무왕 사후에 섭정을 맡자 아들 백금(伯禽)을 봉지인 노국으로 보냈다. 3년 후 백금이 돌아와 건국경과를 보고했다. 주공이 까닭을 묻자 백금은 현지인의 풍속과 습관을 모두 바꾸느라고 늦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동시에 봉지로 출발했던 여상(呂尙)은 오늘날 제를 세운 후 불과 5개월 만에 돌아왔다. 주공이 어떻게 빨리 돌아왔느냐고 묻자 태공은 예의를 간소화하고 현지인들의 풍습과 습관을 되도록이면 지키려고 애썼다고 대답했다. 주공은 탄식했다.

“훗날 노의 자손들은 결국 제의 신하가 되겠구나! 정령이 간소하지 않으면 실행되지 않는다. 백성들이 복잡한 정령을 어떻게 지키겠는가? 백성들과 통치자가 친하게 되려면 정령이 평범하고 간편해야 한다. 그렇게 돼야 백성들이 즐겨 따르게 된다.”

제와 노는 은을 멸망시킨 주가 태산을 중심으로 남북에 세운 제후국이었다. 이곳에는 원래 중원에 못지않은 문화와 경제력을 갖춘 동이족이 거주했다. 주는 황하하류를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건국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여상과 주공에게 분봉했다. 완전히 달랐던 전략은 이후 양국의 문화적 차이를 결정했다. 왕족 백금은 황하 중상류의 주문화를 태산의 남쪽 노에 억지로 옮겼다. 그러나 오랜 세월동안 형성된 예의와 풍속은 강력한 보수성을 띤다. 백금은 이러한 특성을 무시하고 강제로 변혁을 시도했다가 사회적 안정을 잃었다. 동이족 출신 여상은 탁월한 정치가이자 권모의 비조였다. 전통의 보수성을 인정한 그는 오히려 원주민 고유의 문화를 인정해 단기간에 통합을 이루었다. 간소한 예절과 의식은 누구나 쉽게 지킬 수 있었다. 후손들은 그의 방침을 답습해 정치문화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환공을 최초의 패자로 만든 관중(管仲)은 사람들이 지키려고 하는 풍속은 남겨두고, 지키지 않으려는 것은 버렸다. 경공을 도와 제의 중흥을 이룩한 안영(晏嬰)은 자기 나라의 민속을 바탕으로 국가를 통치했다. 그는 공자가 노의 도덕률과 풍속을 바탕으로 체계화한 유가의 번잡한 예의와 제도가 질박한 전통을 지닌 제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반대했다. 제와 노의 이질적인 건국방침은 흥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제는 단기간에 원주민과 일체를 이루어 강대국이 됐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할 때에도 가장 마지막까지 버텼다. 그러나 노는 원주민과의 끊임없는 마찰로 국력이 약해져 3류 국가로 전락했다. 주공단은 제와 노의 건국전략이 지닌 강약점을 정확히 판단하고 양국의 미래를 예측했던 것이다. 한 닢의 낙엽이 지는 것을 보고 머지않아 가을이 올 것을 알고, 서리를 밟으며 머지않아 혹독한 겨울이 다가 올 것을 깨닫는 것이 지혜이다. 주공단은 여상의 탁월한 능력을 미리 경계했기 때문에 그에게 가장 멀고 강력한 이민족이 사는 산동성의 북동쪽을 봉지로 주었으며, 그의 성장이 두려워 스스로의 후예들에게 산동성 동남쪽을 맡겨 장차 닥칠지도 모르는 주왕실과 제나라의 충돌을 막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이 중앙정부의 섭정을 맡는 바람에 봉지에 대한 배려를 하지 못했으므로 결국은 염려가 사실로 드러나는 것을 지하에서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상이 현지인들의 풍속과 문화를 그대로 답습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동이족이었으므로 그들의 문화에 아무런 반감을 지니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그는 은왕조의 멸망이라는 공동의 과제를 해결한 후 자신에게 닥쳐올 정치적 위기를 예상하고 주공이 중앙정부로부터 가장 먼 곳으로 보내려고 하자 기꺼이 수락했을 것이다. 그가 주공의 조치에 반발했더라면 통치권력의 강화를 위해 자신의 형제들마저 죽인 주공의 손에 제거됐을 것이다. 주공과 여상이라는 탁월한 전략가들의 머리싸움을 느끼게 하는 이야기이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